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169 전체: 517,976 )
예수님과 사도들 - 사도 바울 (바울의 회심)
daekim

 

“사울이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되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9:1-9)

 

기독교 사에 바울이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 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했으며,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자로서 3차에 걸쳐 선교여행을 하며, 수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교인들을 양육했을 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삼분의 일을 기록한 사도가 바울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바울은 충성스러운 사도요, 위대한 신학자요, 최대의 선교사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많이 닮은 사도이기도 하다. “눈물과 겸손과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보고, 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끌려는 거짓된 무리들을 물리치며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킴으로 의의 면류관을 받은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이 바울이다.

 

베냐민 지파에 속한 그는 길리기아 출신으로서 본래 이름은 사울이었다. 그의 부모들이 같은 베냐민 지파이여,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의 이름을 본 따 사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차 선교여행을 시작하면서 바보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을 만난 후부터 그는 바울로 불리우기 시작했다(헹 13:9).

 

하나님을 만난 후 야곱이 이스라엘로, 시몬이 베드로서 그 이름이 바뀌었듯이 사울도 바울이 된 것이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수도로서 그 당시에도 인구가 오십만이나 되었으며, 정치, 경제, 학문의 중심지였다.

 

안토니오는 다소를 자치령으로 선포하고, 그 곳 주민들의 세금을 면제해 주었으며, 다소인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고 한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면서 위험에 처할 때마다 유용하게 사용한 로마 시민권은 다소 태생인 그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연약하고 볼품없는 모양새의 사람이었다(고전 2:3; 고후 10:10). “바울과 테클라 행전”(Acts of Paul and Thecla)에는 바울의 외모에 관해 “몸집은 작고, 대머리에 가까울 정도로 머리 숱이 적고, 눈썹은 거의 맞다 있었으며, 코는 굽어지고, 눈은 쑥 튀어나와 있었다.”라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보잘것없는 외모와 달리 바울은 그와 견줄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로 높은 학문과 깊고 넓은 지혜와 지식의 소유자였다. 그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율법학자 가말리엘 밑에서 배우며 수련을 쌓은 바울이기 때문이었다.

 

“율법의 영광”으로 알려진 가말리엘은 유대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랍비였으며, 유대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산헤드린 공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기도 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복음을 전파하던 사도들이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위기에 처하자 가말리엘은 그들이 전파하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면 얼마 가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면 결코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이라 경고한 그였던 것이다.(행 5:38-39)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한 율법주의자 바울이 기독교와 처음으로 마주치게 된 것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였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며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하다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되어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게 된다.

 

그 자리에서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열거하며 구원은 율법의 준수나 형식적인 예배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역설한다. 스데반이 “하늘이 열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것을 본다.”라며 설교를 끝내자 그들은 흥분하여 그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 기도한다. 그런 스데반을 보며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그는 죽어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바울이었다. 철저한 바리새인이요, 율법주의자인 바울과 순교자 스데반은 만남과 동시에 영원히 갈라선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길로, 스데반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가혹하게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스데반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달리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기만 하다.

 

스데반의 순교를 시발점으로 믿는 자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박해가 심해지자 사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져 나간다.

 

그러자 바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다메섹의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공문을 받는다. 그곳에 있는 믿는 자들을 찾아내어 모조리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여 멸절시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인생의 사명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바울 일행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밝은 빛이 비쳐왔다. 순간 바울은 쓰러지면서 하늘에서 들려오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째서 나를 핍박하느냐?”란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울이라 부르신 것은 그가 찾은 사람은 믿는 자들을 진멸시키려는 사울이었기 때문이다.

 

사울이란 이름을 두 번이나 연달아 부르신 것은 그에게 주실 중대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죄 범한 아담을 부르실 때나(창 3:8-9),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나(출 3:4). 성전에 누운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삼상 3:4-6) 그들의 이름을 두 번씩 연거푸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박해하는 사울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며 “어째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시자 바울은 그가 핍박하며 멸하려 한 상대는 성도들이 아니고 예수님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바로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 말씀하시며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일러주신다. 순간 바울은 예수님의 교회를 핍박하며 성도들을 괴롭히는 것이 뒷발로 가시 채를 차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임을 깨달으며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천사 같은 얼굴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던 스데반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목적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 묻는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바울이 탄생한 것이다.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힘없이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가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고기 잡은 어부에서 사람 낚은 어부로 변한 것처럼 말이다(눅5:1-11).

 

앞을 볼 수 없게 된 바울은 수행원들에게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고,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을 찾아가 그의 눈을 뜨게 해주라고 분부하신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바울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라며 의아해 하자, 예수께서는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행 9:15)라 말씀해 주신다. 그때서야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에게 안수하며 기도하여 잃어버렸던 시력을 되찾게 해준다.

 

바울이 정치, 경제, 종교, 교육의 중심지인 다소에서 성장하며 세상 학문을 익히고, 최고의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우고, 로마 시민권까지 획득하게 된 것은 그를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민족의 지도자 모세를 애굽 왕실과 미디안 광야에서 80년이나 훈련시키셨던 것처럼 말이다. 자라난 환경과 받은 교육 때문에 바울은 유대교의 골수분자가 되어 기독교를 핍박하게는 되지만 예수님은 그를 회심시켜 하나님의 뜻대로 이방선교를 위한 전도자로 만드신 것이다.

 

바울의 등장과 그의 회심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가는 사도행전에 그의 회심에 관한 기록이 세 번이나 나온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행 9장, 22장, 26장). 물론 그 기록들은 같은 내용이긴 하지만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른 대상들에게 바울이 들려준 회개의 고백이다.

 

하지만 세 차례나 같은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바울의 회심의 중대성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회개한 바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로서의 가치관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예수님을 아는 것만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지니게 되었다(빌 3:8-9).

 

이 같은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바울은 “나는 죄인의 괴수였으며, 지금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외치며 하나님이 귀한 사도로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최대의 적이었던 그에게 예수께서 이방선교의 사명을 부여하자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로 달려간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등 수많은 믿음의 용장들이 그러했듯 광야대학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자기 자신을 새롭게 정립함과 동시에 이방인들에게 영생에 이르는 길을 알려줄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