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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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사도들-가룟 유다와 사도 맛디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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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인 무리의 수가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때에 베드로가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사람은 본래 우리 가운데 참여하며 직무의 부분을 맡았던 자라. (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온 지라.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그들의 말로는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그들이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직무를 버리고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 가니라.”( 1:15-26)

 

유다의 죽음에 관한 마태와 누가의 기록이 조금 다르다. 마태는 유다가 받은 돈을 대제사장들에게 돌려주려던 날 자살했다고 증언하지만, 누가는 그 보다 후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는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마 27:5)고 되어있지만 사도행전에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 삼십으로 땅을 산 후에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서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행 1:18-19)

 

어쨌든 이 같은 사실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유다가 잘못된 판단으로 저지른 죄로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 했지만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유다의 한 일을 “악랄한 배신” 아닌 “이유 있는 배신”이라 변호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마르틴 루터 킹 박사에게 인종차별이 근절되는 날을 바라는 꿈이 있었듯이 유다도 예수님을 앞장세워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기 원하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고 로마정권을 몰아내시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도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서는 아닐지 모른다.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면 능력을 행사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로마를 무력으로 멸망시키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라 말하고 있다. (William Barclay: "The Acts of The Apostles", P. 9)

 

사람들이 무어라 하던 성경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의롭고 순수한 동기에서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따라서 유다는 사탄의 사주를 받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은 악랄하고, 교활하고, 비열한 배신자임에 틀림없다.

 

예수께서는 어째서 유다가 그를 배반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를 제자로 택하신 것일까? 이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인간이 되신 까닭과 직결된다. 하나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무지한 인간들에게 살해당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들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허락해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로 향하시는 마지막 단계에서 그 길을 예정대로 가실 수 있게 한 사건이 유다의 배신이었다.

 

그렇다면 유다는 배신자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역할을 잘 감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십자가로 가지만 나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마 26:22) 하심으로 유다의 배신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죄임을 밝히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유다가 그 악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유다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의 선택권을 올바르게 행사하지 못하고 용서받기 힘든 죄악을 범한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배신자 둘을 들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와 시저를 죽인 부르투스를 꼽는다고 한다. “배반”이란 죄 자체가 인간이 범해선 안 될 추하고, 야비한 것이지만 유다와 부르투스는 그들이 배신해서도 안 되고, 배신할 수도 없는 사람들을 배반했기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인류역사에 기록된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 넘긴 배반자로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히 기억될 유다의 생애를 보며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뜻을 어기며, 예수님에게서 인정받을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며, 주님의 손과 발에 또 하나의 못을 박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의 일원으로 하나님의 역사운영의 동역자가 될 수 있었던 귀하고 영광된 기회를 포기한 유다의 최후는 참으로 비참했다. 예수님을 판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유다의 그 같은 최후로 열두 사도가 열한 명으로 줄어들자 베드로는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자고 제의한다.

 

그때 베드로가 사도가 될 수 있는 조건으로 제시한 첫 번째는 예수님의 지상사역에 함께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하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행 1: 21-22)

 

이 두 자격을 갖춘 요셉과 맛디아를 후보로 내세우고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행 1:24-25)라 기도한 후 투표한 결과 맛디아가 사도로 결정되었다.

 

맛디아가 사도로 선출되었다는 것 외에 그에 관련된 기록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사도로 선출되기는 했지만 그는 사도로서의 능력과 자질이 부족하여 실제로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나 클레멘의 기록으로부터 우리는 맛디아의 활약상을 찾아볼 수 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맛디아는 예수께서 각 동네와 지역으로 떠나 보낸 70명 제자들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클레멘은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으며, 그곳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한 삭개오가 맛디아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확실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클라멘은 맛디아는 세례 요한처럼 금욕주의자로서 철저하게 육신의 욕구를 억제하는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맛디아는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1: 2:16)에서 벗어나야 하며, 굳건한 믿음 위에 서서 주를 아는 은혜와 지식 가운데 자라가야 한다.“(벧후 3:18)고 가르쳤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맛디아는 Armenia에서도 상당 기간 선교활동을 했으며, 안드레가 유럽 남동지역에 위치한 Scythia에서 야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를 도와 함께 일했다고 한다.

 

맛디아의 그 다음 행적은 흑해 북방에서 복음을 전파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있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던 맛디아는 주후 51년경에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맛디아는 요한의 형 야고보에 이어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사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은 “나를 따르라.”였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무엇을 하시든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드리지 못한 것 같다. 십자가를 향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의 부귀영화를 동경하며 추구했던 제자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상 끝까지 가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동시에 그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신 후(행 1:8) 하늘로 올라가셨다.

 

하늘나라로 돌아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며 천사들이 물었다고 한다. “생명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조처를 취해 놓고 오셨나요?” “물론이지,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세상 구석구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부탁하고 왔으니까.”

 

천사들이 다시 물었다고 한다. “그들이 그 사명을 잊어버리거나 감당하지 못하면 어쩌나요? 세상의 핍박으로 인해 복음증거의 사명을 포기하면 어쩌나요? 그럴 경우에 대비하여 별도의 방안을 마련해 놓으셨나요?” 예수께서 답변하셨다고 한다. “나에게 다른 방안은 필요 없노라. 나는 열두 사도들을 믿노라.”

 

사도들은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신뢰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든 사도들이 죽기까지 충성하며 복음의 깃발을 들고 달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70억이 넘는 세계 인구 중 기독교인의 수는 30억에 육박한다. 2,000여 년 전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영향력도 없는 소수의 미약한 무리가 성령으로 무장하고 복음전선에 뛰어들어 피 흘리며 싸운 결과다.

 

그러나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들은 기억해야 한다. 그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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