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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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사도들?- 사도 다대오와 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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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롯 유다 예수를 자라.”( 10:2-4)

 

다대오는 “찬양”이란 의미를 지닌 “유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의 인적 사항에 관해서는 성경에도 나타난 것은 없고, 초대교회의 사가들이니 교부들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전설에 의하면 아기 예수가 탄생하시던 밤 천사들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목자들 중의 하나가 다대오였다고도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때 다대오는 10살 내지 12살의 소년이었을 것이고, 40이 넘은 나이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것이기에, 그가 이란에서 순교할 때에는 90이 넘었을 것이다.


고대인들의 수명이 지금보다 짧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초대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90이 넘도록 생존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 점을 감안하면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다대오가 10대 초반의 목자였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성경에는 다대오가 열두 제자들 중의 하나라고 그 이름이 명시되어 있을 뿐 그의 출생이나 학력이나 직업에 대하여는 침묵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다대오는 그 당시 유대에 존속했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열심당원 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실은 최후의 만찬 때 그가 예수님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 14:22)라 한 질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질문의 의미는 어째서 예수께서 로마정권을 붕괴시켜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며, 예수님의 나라를 이룩하지 않느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대오는 이 질문을 함으로 그가 무력투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열성당원이었음을 스스로 들어냈다고도 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다대오는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모르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예수님의 승천 후 다대오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성경에도, 성경 아닌 다른 문서에도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전해지는 여러 가지 부분적인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다대오는 아프리카, 이집트, 영국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다 이란으로 들어가 선교하던 중 순교한 것으로 되어있다.


아프리카에 기독교가 전파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2세기 말경에 아프리카에는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있었으며, 주후 306년부터 337년까지 로마를 통치한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를 통치하던 때(주후 306-337)에는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 상당수의 주교들까지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다대오와 그의 제자들이 아프리카 북부와 이집트 서부를 왕래하며 이 같은 기독교의 기반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주장은 아니다.


주후 43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된 영국에 언제 기독교가 전파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니고데모와 함께 그의 묘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던 아리마데 요셉이 영국 영토였던 Glastonbury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교부 중의 하나님 Tertullian도 영국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 기독교가 이미 전파되어 있었다고 말해준다. William Steuart McBirnie는 “The Search for the Twelve Apostles"에서 다대오가 영국 땅을 밟은 것은 주후 60년경인데, Boadicea 여왕이 일으킨 로마에 대항한 격렬한 반항운동으로 숱한 외국인들이 핍박을 당하게 되었지만 다대오는 용하게 그 곳을 빠져 나와 중동지역을 거쳐 이란으로 들어갔을 것이라 기술하고 있다.


복음의 깃발을 들고 다대오와 함께 달리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같이 순교한 유다는 ‘가나안인’ 시몬이라 불리기도 했다(마 10:4). 이름이 같은 시몬 베드로와 구별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열심당원을 뜻하는 “카나니”가 “가나안”으로 잘못 표기되어 그리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유다는 다대오와 마찬가지로 폭력과 무력으로 로마에 대항한 열심당원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뜨겁게 사랑하는 애국충정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카나니”가 “가나안”으로 되었다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정권과 무력 대결을 꾀하던 유다가 로마의 하수인이 되어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 마태와 어떻게 별문제 없이 예수님을 섬길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할 줄 안다. 무력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추구한 열심당원 유다와 로마 정부를 위해 일하는 세리 마태가 함께 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고 신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무한한 감화력과 놀라운 복음의 능력에 녹아지지 않는 적대감이나 미움이나 증오의 감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애국자 유다와 민족의 배반자라 여겨지던 마태가 주 안에서 손잡고 일했다는 것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세리를 용납하고 함께 예수님을 섬기면서도 유다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갈망하는 마음은 뜨거웠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누군가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행 1:6)라 물었는데, 그 사람이 유다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생각이 옳다면 열심당원 출신 유다는 그때까지도 그의 조국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질문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무겁고 슬프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세상 만민을 위해 구원의 문을 열어놓고 승천하시는 순간까지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제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유다의 애국심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사명은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땅 끝까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 일러주시자 유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애국심을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으로 바꾸어 그의 남은 인생길을 달렸던 것이다.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소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지로 흩어져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할 때 유다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매우 빈약하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역사가인 Eusebius가 20세기 신학자로서 오순절 이후 열두 사도들의 발자취를 추적한 William Steuart. McBirnie에 의하면 유다는 소아시아, 북 아프리카, 이집트, 흑해 지역과 영국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Eusebius의 기록을 보면 유다가 중동지역에 위치한 Osrone에 갔을 때 그 나라 왕 Abgar가 거기서 각종 병자들을 고치며 복음을 전파하는 유다를 궁으로 초대했다.


그때 Abgar 왕은 불치의 병에 걸려있었는데 유다가 거기 도착하기 전에 유대에 계신 예수님에게 그 나라에 오셔서 그의 병을 고쳐달라고 서신을 보냈다. 그 서신을 받아보고 예수님은 그가 유대 땅에서 사명을 완수한 후 그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야 하니 갈 수 없지만 나중에 그의 제자를 보내 그의 병을 낫게 하고 그에게 새 생명을 주겠다고 사신에게 전해주셨다. 그런데 유대에 와서 복음을 전하며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가 예수님이 보낸 사람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유다를 초청한 것이다.


Abgar 왕을 만난 유다는 자신이 예수께서 보낸 제자임을 밝히고 왕에게 그리스도를 믿느냐고 물었다. Abgar 왕은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만약 로마 정부가 나를 막지 않았다면 나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고까지 했습니다.”라 답했다.


유다는 예수님의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 하늘나라로 가셨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 후에 왕에게 안수 기도하여 그의 병을 고쳐 주었다. 그리고는 인류구원의 사명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영광 중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 말해준다. Abgar 왕에게 사도신경을 가르쳐 준 것이다.


Abgar 왕이 후하게 사례하려 하자 유다는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도입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의 것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Abgar 왕의 허락을 얻어 그 나라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한 후 유다는 Armenia로 선교지를 옮겨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웠는데 안드레, 다대오, 나다니엘, 그리고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로 선출된 맛디아가 거기 와서 유다의 사역을 도왔다.


유다는 상당히 오랜 기간 Armenia에 머물렀는데 주후 66년경에 영국에서 그리로 온 다대오와 함께 이란으로 갔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기독교를 배척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유다와 다대오의 선교활동은 순탄하지 못했다. 거기다 에디오피아에서 마태를 박해하다 그리로 도망 온 두 마술사 Zaroes와 Arfaxat가 유다와 다대오의 선교활동을 결사적으로 방해하는 통에 그들의 어려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6만 명 이상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주후 79년에 Suanir 시로 갔다. 그런데 거기까지 쫓아온 또 다른 마술사 Magi가 원주민들을 선동하고 동원하여 유다와 다대오를 난도질 쳐 죽였다. 유다는 최후의 순간에 다대오를 쳐다보며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말하며 숨져갔다고 한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사도가 유다와 다대오였다. 그러나 그들 두 사도는 역사의 흐름을 바꾼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인생의 경주를 마친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 일꾼들이었다. 조용히 뒤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린 유다와 다대오의 삶을 본받아 사는 우리들 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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