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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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간음하다 잡힌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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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어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서있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 7:53-8:11)

 

유대인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이 끝난 다음 날 새벽에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시고 모여든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갑자기 성전 밖이 떠들썩해지더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한 여자를 끌고 들어와서 성전 뜰에 세우더니 앞장선 사람이 큰 소리로 예수님께 물었다. “이 여자가 음행하는 것을 현장에서 붙잡아 왔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초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면서 광야를 헤맬 때 그들을 인도하며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지키던 명절이었다. 이 초막절 마지막 날 밤에 동기와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불륜행위를 하던 여자가 붙잡혀서 예수님이 계신 성전으로 끌려온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세우고 어찌했으면 좋겠냐고 물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성결하게 여겨서가 아니었다. 의와 정의와 순결과 정절을 추구하는 마음이 강해서도 아니었다. 죄에 대한 분노는 더욱 아니었다. 그들이 간음의 현장에서 적발된 여인을 산헤드린 공회로 끌고 가지 않고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까닭은 그녀를 미끼로 하여 눈에 가시 같은 예수님을 잡을 구실을 발견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을 명절 중에 잡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아오라 보낸 사람들이 그의 말씀에 감화되어 그냥 돌아오자 당황하면서도 다른 방도를 간구하던 중 이 여인이 걸려든 것이다. 


회전 빠른 그네들의 머리는 그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잡을 방안을 마련하고 즉시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들의 손에 들어온 것은 제보에 의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들 중 누군가가 그녀를 의도적으로 유인하여 저질은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녀가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혔다면 남자도 같이 있었을 터인데 여자만이 끌려왔다는 사실이 이 같은 가능성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잡아온 여인을 가리키며 “이 여자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 물었을 때 예수께서 율법대로 돌로 치라 하셨다면 그들은 주님이 사랑을 강조하면서 사랑을 외면하는 위선자라 낙인 찍음과 동시에 유대인에게는 사형을 명할 권한이 없다는 점을 들어(요 18:28-31) 예수님을 로마법을 어긴 범법자로 몰아 체포할 구실로 삼았을 것이다. 그녀가 한 일을 묵인하고 돌려보내라고 했다면 율법을 무시하는 이단자로 규정하여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할 근거를 마련했을 것이고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어떤 결정을 하시더라도 그들의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그들은 확신했을 것이다. 후일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마 22:17)라 예수님께 물으면서 희심의 미소를 지었던 것처럼 말이다.


기세 등등하게 대답을 독촉하는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몸을 굽혀서 땅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이 어째서 몸을 굽혀 땅에 글을 쓰셨으며, 무엇을 쓰셨을 가에 대한 추측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이 완악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숨겨진 죄악들을 나열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난처한 입장을 벗어날 방법을 생각할 시간을 벌고자 무언가 쓰는 것처럼 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막연한 추측이요, 가상일 뿐이다. 예수께서 쓰신 내용이 남아있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기 시작하자 여인을 향하던 멸시와 증오에 가득한 수많은 눈초리들이 허리를 굽히신 예수님에게로 쏠렸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을 순간을 기다리는 여인을 향하던 증오의 눈길들을 그 자신에게로 옮기신 것이다. 갈보리 언덕에서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해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것처럼.


속히 결단을 내리라는 그들의 독촉이 계속되자 예수님은 조용히 일어나셔서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이 다시 몸을 굽히시자 떠들썩하던 성전 뜰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도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도 못했다. 죄 없는 자가 첫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강력한 폭탄처럼 그네들의 양심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그의 한없이 크신 사랑과 은혜가 함께 담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들은 하나 둘씩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고 성전 뜰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긴장과 공포가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에 쌓였던 성전 뜰에 찬란한 아침 햇빛이 비치며 고요와 평화가 찾아 들었다.


간음한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치되 그 집행은 죄가 없는 사람부터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라 하신 것과 동일한 기준과 원칙에 입각하여 하신 말씀이시다. 


자기 눈에는 들보가 들어 있는데도 남의 눈에 보이는 티를 뽑겠다고 덤벼드는 사람들처럼 자기네가 범한 흉측한 죄악들과 숱한 마음의 간음들은 “내로남불”의 원칙을 적용시켜 정당화 시키고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겠다고 달려드는 무리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죄가 없거든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가 예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살기등등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고 넓은 성전 뜰에 남은 사람은 예수님과 여인뿐이었다. 간음의 죄를 범한 여인이 죄 값을 치를 때가 찾아온 것이다. 그녀에게 돌을 던질 자격을 갖춘 이는 예수님뿐이었기 때문이다. 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여인에게 예수님이 물으신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있느냐?” 예수님의 인자하신 음성을 들은 여인이 ”주여, 없나이다.”라 대답하자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하신다.


이렇게 끝나는 “예수님과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와 교훈은 많고도 귀하기만 하다. 우선 우리에게는 마음에 안 든다고 이웃을 비난하고, 비판하며, 마음대로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음을 깨달아야 할 줄 안다. 범법행위를 하거나 제도나 규정을 어기면 거기 합당한 법의 제재를 받으며, 처벌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해야만 질서가 유지되며 안전하고 평화로운 국가나 사회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행 17:16).


그러나 우리의 인간됨을 평가하고 우리가 범한 죄를 정죄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이 같은 진리를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처벌하지 않고 돌려보냄으로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경고만 하고 그냥 돌려보낸 것을 보며 우리는 정의가 항상 다수의 편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줄 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율법의 의를 실현하는 길이라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다. 중죄를 범했을 지라도 그녀로 하여금 지은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예수께서는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또 하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시며 그녀를 방면한 것은 예수님이 그녀의 간음죄를 묵인하거나 용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며(롬6:23), 그 사망의 형벌을 면죄 받으려면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맞아드려야 하는데, 그 여인은 그런 회개를 하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그러나 너는 죄의 생활을 청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최후의 심판 시 내가 너에게 무죄판결을 내릴 수 있다.”였던 것이다.


다시는 죄의 길을 걷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나간 여인이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빛이 비추이면서 숨겨졌던 그들의 무서운 죄들을 보게 되었으면서도 죄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 여인은 광명한 빛을 받아 노출된 그녀의 죄를 인정하고 죄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았을 것을 확신한다. 그녀의 올바른 결단이 우리 모두의 선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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