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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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daekim

 
 
학생시절에 나름대로 여러 분야의 책들을 상당히 많이 읽었다. 그들 중에는 읽기는 했어도 그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아직도 머리에 입력되어 있어서 설교준비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누군가 그것들 중에서 내 마음의 양식이 되었고, 나의 인격이 형성되는 밑거름이 되어준 가장 중요한 책들을 열거해 보라고하면 빼놓고 싶지 않은 책 세 권이 있다. 고등국어 1, 2, 3권이 그것들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 책들을 무척 좋아했지만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렸던 시, 시조, 수필, 평론들은 내 가슴속에 파고들어 새겨져서 나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그 중의 하나가 고등국어 2에 수록되었던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시작되는 이 수필은 정상적인 희로애락의 감정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슬퍼질 수밖에 없는 숱한 슬픔의 사연들을 나열해주고 있다.


“오뉴월의 장의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보랏빛과 흑색과 회색의 빛깔들. 둔한 종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털.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이삼절, 어린아이의 배고픈 모양, 철창 안에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무 위에 떨어지는 백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끝나는 이 글을 내가 지금도 암기하고 있을 정도로 여러 번 읽으며 슬픔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해방이 되면서 그 많던 재산을 고향인 황해도 안악에 남겨 두고 남하한 아버지는 그런대로 6.25사변 전까지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내셨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부터 우리 집은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쪼들리게 되었다. 


용산에 있던 녹색의 장원 같던 집이 폭격으로 없어져 버렸고, 금촌에 있던 정미소를 처분한 돈마저 믿었던 사람에게 맡겼다 회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고,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자유당 독재정권에 아부하기를 거부했기에 우리 8남매는 가난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 속에서 허덕여야 했다.


 나의 경우 중학 3학년부터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시험조차 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수업료를 기간 내에 납부하지 못하면 교실에서 나가야 했고, 시험 칠 자격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난 버스도 타지 못하고 4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서 학교에 가서도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뒷산에 올라 담장을 사이에 둔 비원과 교정을 내려다보며 지낸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산꼭대기 말 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인촌 김성수 선생께서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5층 건물은 우람하고 장엄했다. 그 본관 앞 좌우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동관과 서관, 크고도 우아한 형태의 대강당과 서울운동장처럼 넓은 운동장이 펼쳐져 있는 교정을 굽어보며 난 흐르는 눈물을 두 주먹으로 닦아야 했다. 친구들 모두가 학업에 몰두하는 시간에 홀로 산 위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는 나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고 가련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난 생각했다. 그 글 어딘가에 “정다운 동무들은 청운의 뜻을 품고 지식과 슬기를 넓히고 있는데 수업료를 내지 못해 혼자서 산 위에 앉아 교정을 내려다보며 눈물 짖는 소년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슬퍼진다.”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가난이 가져다 준 슬픔과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학업을 마치고, 군 복무까지 끝낸 후 캐나다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 땅에 발을 디디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캐나다 정부가 내가 가진 대한민국 여권에 영주권을 찍어준 것은 나의 능력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번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이 나라의 정책에 순응하여 난 한국에서의 나의 학력과 경력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밑바닥부터 시작하겠습니다.”(I am willing to start from the bottom.)를 되풀이 하며 일자리를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민자가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잡아 눈물을 삼키며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살기 위해 허덕이는 이민자로부터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개척자로 탈바꿈해야겠다는 생각이 영감처럼 떠올랐다. 난 주저하지 않고 Tyndale Theological Seminary의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내 인생의 설계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목사가 되었다. 


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겸손하게 성도들을 섬기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법정통역을 통해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는 분들을 돕는 현장목회에 열중하며, 여러 신문에 글을 써서 우리의 권익을 보장받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동포들에게 주지시키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땅 위에 견고한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이민1세들의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확인하는 기쁨과 보람도 느꼈다.


우리 모두의 백절불구의 인내와 용기는 심는 대로 거두는 만고불변의 원칙에 따라 우리들이 바라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고 믿어진다. 한인 이민자들은 불과 50여 년의 짧은 이민역사를 통해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 정착한 여러 소주민족보다 더욱 탄탄하고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안톤 슈낙

 


이민 초기에 당했던 갖가지 수모와 억울함과 서러움이나 안톤 슈낙이 들려주는 “첫 길인 어느 촌부락에서의 외로운 하룻밤”같은 날들을 옛 이야기 삼아 하며 이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당당하게 활약하는 Korean-Canadian이 된 우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 없고, 아는 것도 없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던 이민초기의 난관과 고통을 뒤로한 오늘 날의 동포사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노라면 찾아 드는 슬픔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의리와 신의”, 조금씩 퇴색해 가는 “올바르고, 선하고, 정의롭게 살려는 마음의 자세”, 그리고 지금 한국이 처해있는 위험한 현실을 방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이들로 인해 슬퍼진다는 말이다. 


먼 타향에서 죽마고우를 만났을 때 출세하고 부유하게 된 신분 때문인지 손을 내밀기는 하나 그 눈빛은 거만하고 냉정함을 느낄 때 슬퍼진다고 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중의 한 대목의 슬픔이 지금의 나의 슬픔인 것 같다.


내 가슴에 찾아 드는 서글픔은 가난과 고통의 시기가 지났다고 “내로남불”의 원칙을 자연스럽게 실천하거나, 떠나온 조국의 혼란한 상황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고난의 세월을 함께 극복하며 살던 옛 친구들의 아픔과 서러움을 외면하는 사람들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 나의 진심이 받아 드려지지 않고, 나의 선한 의도가 왜곡 되거나, 그들이 편리한 대로 변형되는 것을 보면서도 슬퍼진다. 지난 몇 달 동안에도 같은 단체에서 일하던 사람과 많은 생각을 공유하던 동료의 충격적인 행동 때문에 그런 슬픔을 느끼며 “부르트스, 너 까지도?”라 외치며 눈을 감아야 한 씨이저의 슬프고 아픈 마음을 되삭여 볼 수 있는 일들을 체험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들로 인해 슬퍼진 것이다.

 

상대의 진심을 왜곡하거나 상대의 선한 의도를 자기 생각의 틀에 맞추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잘못된 일이다. 그것은 자기를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슬프게 할 뿐 아니라 우리들이 함께 짐을 지고,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하나 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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