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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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예수님은 선한 목자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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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께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1-18)

 

 

원숭이가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다는 진화론자들이 있다. 그들 말이 사실이라면 원숭이는 인간을 가장 닮은 동물이다. 하지만 생물학자들 중에는 생쥐의 신체적 기능이 인체와 유사하다는 이들도 있고, 조직적인 집단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개미와 벌은 인간을 닮은 생활을 한다는 이들도 있다. 최근에는 돌고래 두뇌의 기능이 인간과 비슷하다는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 보고도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양과 같으며 예수님이 목자라고 말해준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기에(시 77:20),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원히 그를 찬양해야 한다고 말한다(시 79:13). 이사야도 우리는 모두 잘못된 길을 가는 길 잃은 양 같다고 했으며(사 53:6), 예수께서는 유대 땅 구석구석을 다니시며 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실 때마다 “목자 없는 양”같다며 그들을 긍휼이 여기시며 “나는 선한 목자”라 선언하신 것이다. 


양을 키우는 것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주된 생계수단이었다. 그러기에 그곳 사람들은 양과 목자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양은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음은 물론 시력도 약하여 무리에서 이탈하게 되면 방향을 잡지 못하여 이리저리 헤매다 사나운 짐승들에게 해를 당하거나 험한 골짝이나 산중에서 헤어나지 못하거나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양들을 돌보는 목자들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일에 매달리는 여인들보다도 많은 일들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때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여우나 이리가 많았고, 때로는 사자들까지 나타나곤 했기에 목자들은 양 무리가 그런 난폭한 짐승들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양을 노리는 도둑이나 강도들에게 해를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부담까지 지니고 있었다. 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가 “끊임없이 양떼를 돌보며,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물러나지 않는 용기를 지니고, 양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좋은 목자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의 양들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배부르게 먹이실 뿐 아니라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양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은 그들을 돌볼 목자들을 고용해야 했다. 


그런데 고용된 목자들의 관심은 그들이 지켜야 할 양들이 아니고 받을 삯에 있을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그들 삯꾼 목자들은 양을 치다 사나운 짐승들이 나타나면 양들을 보호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도망가곤 했다. 


그렇게 되면 양들은 제각기 흩어져 이리나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갈 곳 몰라 헤매다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그들과 같은 삯꾼 목자가 아니라 양들을 보호하며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한 목자 예수님이 그의 양들을 어떻게 돌보시는 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로 시작하여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로 끝나는 다윗의 기도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시 23:1-6). 


선한 목자는 그가 돌보는 양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 하나하나의 특징과 문제점들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 모두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불러가며 그들의 안전을 확인하곤 했다. 양들도 목자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응답했으며, 다른 목자들이 그들을 불러도 결코 따라가지 않았다. 이 같은 목자와 양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관계와 같은 것이기에 하나님의 양인 우리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보호를 밭으며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맡겨진 양떼를 먹이는 대신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고, 그 털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병들고 연약한 양을 고쳐주지도 않고, 상한 양을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양을 찾지 않고, 그들을 거칠고 잔인하게 다루며 그들이 흩어져서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는 거짓 목자들은 그의 진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경고하셨다(겔 34:1-6).


이 경고는 참된 목자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신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가장 충실하게 감당하신 분이시다. 악령에 사로잡힌 불우한 이들과 병마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고쳐주셨으며, 길 잃고 방황하는 무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셨고, 영육 간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과 육의 양식을 풍족하게 공급해 주셨으며, 역경과 고통으로 넘어진 이들이 하늘나라의 소망을 보며 일어날 수 있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선한 목자로서 하신 가장 큰 일은 그의 양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롬 3:23),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따라서 우리들은 죽음이란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을 위한 순국도 아니며, 기독교를 위한 순교도 아닌 죄 범한 인간을 죄의 값인 사망에서 구하기 위한 대속의 죽임이었다. 우리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예수께서 대신 오르시어 영원히 죽을 우리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인간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죄성을 지니지도 않으셨고, 죄를 범하지도 않으셨다. 예수께서 “너희 중에 내게서 죄를 찾아낼 사람이 누구냐?”(요 8:46)고 물으신 사실이 이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처럼 죄와는 무관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의 사명을 주시며 세상에 보내실 때 예수님은 그 말씀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죄 없으신 그가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의 형을 당해야 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사와 찬양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대신 그를 배척하고 핍박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한 발길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이사야는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슬픔과 고통을 당했지만 묵묵히 십자기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는 죽음의 형벌을 받으셨다.”(사 53:1-7)라 들려주고 있다.


예수님이 치욕과 고통의 십자가에 달리시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귀중한 진리는 우리를 살리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은 비참한 패배 아닌 빛나는 승리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다시 내가 다시 얻기 위해서다.”라 설명해 주신다. 


죄인들을 위한 그의 대속의 죽음은 생명의 부활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일러주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으며,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 외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영생을 누릴 특권이 주어짐을 전파하였다. 


어떤 값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영생이란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예수께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하신 말씀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문이신 우리 안에 거하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 결코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신세가 되지 않음은 물론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도 영원한 삶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선한 목자 예수께서 지키고 인도하시는 양떼 속엔 그의 몸 된 교회도 포함되어 있다. 그 교회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은 크기만 하다. 외부적으로는 포악한 짐승들과 도둑이나 강도들이 교회 안의 양 무리를 해하려는 시도가 그치지 않으며, 내부적으로는 삯꾼 목자들과 사탄에 의해 조종 받는 거짓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파탄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수단과 지혜로는 이 같은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 교회를 파탄시키려는 사탄의 계교를 무산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도를 통해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행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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