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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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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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1:1-10)

 

“나는 생명의 문이다.”는 예수께서 그 자신이 “생명의 떡”이시며, “세상의 빛”이라 밝히신데 이어 세 번째로 그가 누구신가를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런 후 예수님은 그가 어떻게 양 무리를 먹이며 인도하시는가를 설명해 주신다. 


”목자의 땅“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자들은 언제나 앞에 서서 양들을 인도했다. 잘 훈련된 개들을 데리고 뒤에서 양떼를 독촉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던 다른 지역의 목자들과는 정반대였다. 앞장서서 양들을 이끌고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도 목자들은 한시도 그들의 양들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무리를 이탈하여 다른 곳으로 가는 양이 없도록 하며, 다치거나 상처 없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거나 병들어 풀을 제대로 뜯지 못하는 양이 없나 보살피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하루 종일 힘들게 양들을 돌보다 날이 저물면 목자는 양들을 이끌고 우리로 향했다. 그 당시 양 우리는 사면이 바위들로 둘러싸여 있거나 큰 돌들로 울타리를 치는 식으로 만들었다. 밤에 사나운 짐승들이 양들을 해치지 못하고, 도둑이나 강도가 양을 훔치거나 강탈해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바위와 돌들이 유난히 많았기에 그 같은 우리를 짓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우리에 도달하면 목자는 입구에 서서 양들이 병이 나거나 상하지 않았는지 세밀히 살펴본 후에 한 마리씩 안으로 들여보냈다. 모든 양들이 안전하게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목자는 우리 입구에 불을 피우고 그 앞에 앉아 메고 있던 짐승가죽으로 만든 가방에서 빵과 말린 과일과 치즈를 꺼내 저녁을 먹었다.


그런 후 우리의 입구를 가로 막으며 길게 누었다. 양들이 안전하게 안으로 들어갔고, 그도 저녁을 먹었으니 다음 날을 위해 잠을 자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기 위해 누운 목자가 양 우리의 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큰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누구든지 입구에 누운 목자를 타고 넘지 않고는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 하신 것은 그는 그를 따르는 무리의 목자시기에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의 양떼들에게 접근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하신 것은 그가 곧 문이기에 그를 통과해야만 양의 무리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밝히심으로 그의 허락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은 듣는 모든 이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안겨주는 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문 밖과 안의 차이는 참으로 크다. 문 밖에는 차가운 비바람이 불어오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치지만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아늑하고 평화로운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문 밖에서는 어둠과 공포 속에서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공포 속에 떨어야 하지만 근심과 걱정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평안한 마음으로 누워 몸과 마음에 산적된 피로를 풀 수 있는 곳이 문 안쪽이다.


이 같은 문 안과 밖의 자리를 잘 보여주는 장면 중의 하나가 돌아온 탕자를 위한 잔치자리다(눅 15:11-32). 아버지가 눈물로 회개하는 둘째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는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긴 후 살진 송아지를 잡아 마련한 화려한 잔치자리에 앉은 둘째는 아버지 집 문밖에 나가서 당했던 멸시와 치욕과 고통과 슬픔을 모두 잊어버리고 집 안에서의 기쁨과 환희를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늦게 돌아온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한 잔치가 벌어진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그는 캄캄한 밤하늘 밑에 홀로 서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평 그리고 동생을 향한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즐겁고 흥겨운 풍악소리를 들으면서도 외롭고 쓸쓸하게 서 있어야 했다. 문을 사이에 둔 안과 밖의 차이는 이처럼 큰 것이다.


예수께서 그가 양의 문이심을 공포하신 것은 그가 눈을 뜨게 해준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출교 당했을 때다. 바리새인들이 눈 뜬 사람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그를 공회에서 쫓아내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그의 문안으로 맞아드린 것이다. “내가 곧 문이니 내게로 오는 이들은 밖에 세워두지 않고 받아드리겠다.”는 약속대로였다. 


예수님은 그를 구세주로 믿고 찾아오는 그 누구도 돌려보내지 않고 받아 주신다. 예수님 옆의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3)라 하자 예수께서는 즉시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4) 하신 것으로부터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의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드릴 뿐 아니라 그들이 복되고 의미 있게 살며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품 안에 안긴 이들은 누구나 기도를 통해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간구함과 동시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는가를 여쭈어 볼 수 있다. 


1977년 지미 카터가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대통령과의 한 시간”이란 프로그램에 방영되었다. 그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대통령과 통화를 하겠다고 970만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대통령과 대화를 할 수 있는 행운아가 될 수 있었던 확률은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도 어려웠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 대통령과 직접 이야기 하기는 이처럼 힘들지만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이들은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직접 아뢸 수 있고, 하나님의 대답까지 들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집에 들어서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핍박과 환란으로부터 벗어나며, 사탄의 어떤 기습공격을 당해도 굳건히 버틸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를 위해 싸워주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가 양의 문이심을 선포하신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마 11:28)는 초대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사랑의 초대에 응하는 이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며, 편히 쉬게 해주겠다고 약속해 주신다. 이 약속을 확실히 믿었던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주의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요한은 이 사실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 들려준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40명의 도둑들은 탈취한 돈과 보물들을 깊은 산속 동굴에 감추고 입구를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커다란 바위로 막아 놓았다. 그리고는 동굴에 들어갈 때마다 “참깨야! 열려라.”고 소리치곤 했다. “참깨야! 열려라.”가 그 동굴 문을 여는 열쇠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그 암호를 알고 있으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온갖 보화를 소유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드리고 그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지니고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마다 하늘의 기쁨과 풍요를 맛보며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요한은 이것을 문 안에서는 “마음대로 드나들며 꼴을 얻는다.”고 기록했고,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리라.”(빌 4:4:19)고 들려준다. 


믿는 자들이 소유한 세상 재물은 사람들의 눈에는 별것 아닌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주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많은 재물과 보화를 하늘나라에 쌓으며 살아간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롬 8:31)란 말씀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그 문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며, 풍성한 삶의 축복까지 허락해 주신다. 그런데도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예수님은 그들을 가슴 문을 두드리시며 말씀하신다. “볼 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오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양의 문은 무한정 열려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문이 굳게 닫혀버리기 때문이다. 그 문이 열려 있을 때 들어가야 한다. 예수께서 간절히 두드리실 때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를 모셔드려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늦어져서 이미 닫힌 문을 두드리며 신랑 집 앞에서 울부짖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처럼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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