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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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어리석은 부자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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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여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3-21)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 형더러 유산을 나와 나누어 가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 청한다. 오늘 날에도 그렇지만 그때도 유산문제로 형제간에 다툼이 잦았고, 그런 경우 법에 호소하기도 했지만 랍비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예수님도 그에게 적절한 충고를 해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아, 내가 너희 재판관이나 재산 다루는 사람으로 아느냐?”며 그의 유산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신다. 


상속에 관해 모르시거나 사회적 또는 윤리적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어서가 아니었다. 탐심이 얼마나 인간의 마음을 병들게 하며, 인간 세상에 심각한 분쟁을 일으키는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청을 완곡하게 거절하신 후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로 시작하여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들려주신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이 비유의 내용은 간단하다. 어느 부자가 풍성한 곡식을 추수한 후 낡고 작은 곳간을 헐고 큰 곳간을 새로 짖고는 많은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은 후 “이제 여러 해를 쓸 물건을 준비했으니 편하게 쉬고 마시며 즐기게 되었구나.”라 생각하며 흐뭇해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내려다보시며 “어리석은 사람아, 오는 밤에 네 영혼을 거두어 드리면 네가 지금까지 쌓아둔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물으신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그가 현명하고 성공한 사람이라 자부했을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희망 같은 건 가질 생각조차 못하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았던 점을 감안하면 넓고 비옥한 농토를 소유하고 풍성한 곡식을 거둬드려 곳간에 쌓아 놓은 그로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비친 그는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했다. 어째서일까?


풍성한 수확을 거둬드린 후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했어야 했다. 그가 무르익은 곡식을 곳간 가득히 쌓을 수 있도록 풍년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 같은 것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농토가 기름지고, 일꾼들이 주인을 존경하여 열심히 일했기에 거둬드린 수확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네 재산과 네 모든 농산물의 첫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잠 3:10)는 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었다. 


큰 곳간을 가득 채운 곡식 단들을 바라보며 그는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인생의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편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는 말을 되풀이 하며 즐거워한 것이다.


성경의 비유 중 여기서처럼 “나”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곳은 없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것을 거기 쌓아 두고,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꼭 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해준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부자에게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신뢰는 물론 이웃을 향한 배려 같은 것은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의 인생의 중심에는 그 자신만이 자리 잡았고, 타인의 존재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기가 능력이 있고, 소유가 넉넉하기에 인생을 그가 원하는 대로 멋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요 인생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누구도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알지 못했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 삶의 종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생의 시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현세의 삶에 그의 모든 것을 투자하며 행복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의 질서를 혼란하게 하며 파괴하는 불법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눈에 보이게 율법을 어기는 죄악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해야 할 인간의 기본 임무를 행하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다. 


부자가 새 곳간에 가득 쌓인 물건들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거두신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말씀하시면서.


이 대목을 접할 때마다 생각하는 글이 있다. 그것은 로마의 철학자 황제 마르크스 마울리우스의 “명상록”에서 월터 피이터가 발췌하여 그의 생각을 가미하여 쓴 산문이다. 피이터는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원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미약하며 짧은 목숨을 지녔는가를 지적한다.


그런 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마치 그들이 영원한 목숨을 가진 것처럼, 미워하고 사랑하려고 하느냐? 얼마 아니하여서는 네 눈도 감겨지고, 네가 죽은 몸을 의탁하였던 자 또한 다른 사람의 짐이 되어 무덤에 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인간의) 실체는 끊임없는 물의 흐름, 영속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바닥모를 때의 심연은 바로 네 곁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 때문에 혹은 기뻐하고, 혹은 괴로워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고 묻는다.


“바닥모를 때의 심연”이 바로 앞에 있는 데도 영원한 인생을 설계하는 이들에게 인생이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가를 들려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하여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말해준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의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이처럼 인간은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이건만 이 비유 속의 부자는 그의 명철한 판단으로 그의 많은 재산을 토대로 멋진 인생의 청사진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화려한 인생 설계도를 완성한 날 밤 그의 영혼을 소환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너무나 허무하고 불행한 일이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그의 무지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욥은 이 어리석은 부자와 가장 대조되는 인물이다. 동방의 의인 욥은 어느 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의 전 재산을 강탈당하고, 열이나 되는 아들과 딸들이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는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리라.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실 지이다.”라 아뢴다.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로 분별력이 흐려지고, 눈까지 멀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다 모든 것을 남겨두고 죽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인간의 생사화복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그 결과 그는 잃어버린 모든 재산을 돌려받았음은 물론 자녀의 축복까지 누리게 된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다. 재물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많은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대신 불행과 파멸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물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 10)인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따라가기에 물질을 추구하는 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웃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세상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나 능력이나 재능 또는 물질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아 그의 세상을 그의 뜻에 따라 관리하는데 사용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재물을 가장 안전한 하늘나라에 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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