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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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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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어리를 내게 꾸어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 5-13)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가르쳐 주신 “주 기도문”은 마태와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의 것은 마태복음의 것보다 상당히 짧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나타난 기도문 자체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눅11:4)로 끝나지만 이어지는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을 통하여 예수님은 어떤 기도가 응답되는 가를 가르쳐 주신다.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의 무대는 2,000여 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의 한 작은 시골마을이다. 시간은 모두가 잠들어 있는 한밤중. 굳게 닫힌 어느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 집 옆에 사는 사람이었다. 온 가족이 곤히 잠들어 있는 줄을 알면서도 그가 한밤에 그 집 문을 두드린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의 친한 친구가 여행 중 그의 집을 찾았는데 그를 대접할 저녁거리가 없어 옆집에 남은 빵이 있으면 꾸어오기 위해서였다. 


그 상황을 상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여행자는 사람이 왜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친구의 집에 왔는가 하는 점이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 사람들은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피해 해가 지는 저녁 무렵에 집을 나서곤 하였다. 그 여행자도 해가 기우는 시각에 길을 떠났기에 밤중이 되어서야 친구 집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뜨거운 태양 빛을 받지는 않았지만 여러 시간을 걸어온 그는 지치고 시장했을 것이다. 그 친구를 맞아드린 사람은 당황했을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 시골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때 그 지방에서도 피곤하고 허기진 여행자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고 재워 보내는 미풍양속이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밤에 찾아온 친구에게 저녁을 대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집에는 그에게 줄 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당시 대부분의 서민들은 아침에 그날 가족들에게 필요한 만큼만 빵을 구웠기 때문에 저녁 후까지 남는 빵이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빵을 구하러 간 옆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워낙 사정이 급했기에 밤에 친구를 맞이한 사람은 염치불구하고 옆집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빤한 일이지만 그 집의 형편 또한 여의치 않았다. 우선 그때 그 지역 서민들의 집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고, 그 방이 낮에는 거실과 식당과 부엌으로 사용되었고, 밤에는 침실 역할을 했다. 그러기에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집의 출입구를 안에서 닫고 빗장을 지르고 온 가족이 마른 갈대와 잡풀 위에 거적을 깔아놓은 방에 누워 자곤 했다. 


때문에 방의 제일 위쪽에 자던 아버지가 일어나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려면 가족들이 전부 깰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그네들의 집 구조였던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은 모두가 마찬가지였기에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면 밤에는 피차 남의 집을 찾지 않는 것이 당시의 불문율 이었다. 그런데도 워낙 다급했던 그 사람은 옆집 문을 두드리며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주게. 친구가 여행 중에 갑자기 왔는데 우리 집에 빵이 없어서 그러네.”라고 사정을 한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주인은 옆집 친구의 딱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안하네. 자네도 알겠지만 아이들이 모두 자고 있는 지금 내가 일어나 빵을 찾을 수는 없네.”라며 친구를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옆집 사람이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끈덕지게 문을 두드리며 친구에게 줄 빵을 달라고 요구한다면 그 집 주인은 “그가 이웃이어서가 아니라 귀찮아서라도 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데까지가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의 내용이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끈덕지게 간구하기를 쉬지 말라는 것이다. 그 시각에 무례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의 집 문을 계속적으로 두드리며 빵을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의 청을 그 집 주인이 들어줄 수 있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갈급한 심정으로 그를 찾는 믿는 자들의 간구를 어찌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요점인 것이다.


동시에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조용한 하늘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열정적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드리는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이 비유를 마치신 후 예수께서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아낼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말씀하신 것은 이를 의미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이 수록된 마태복음에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이어지는 “어느 아버지가 생선을 원하는 아들에게 뱀을 주며, 알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반문하는 말씀도 마태와 누가 두 복음서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에 관한 여러 정의 중에서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도는 믿는 자의 “호흡임과 동시에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없으며,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천사장 미가엘도 정면대결을 피한(유 1:9) 악하고, 강하고, 간교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험하고 거센 세파를 이겨내며, 때로는 간교한 뱀처럼 때로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우리를 삼키려는 마귀를(벧전 5:8) 물리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기도와 간구로 무장하는 길 밖에는 없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석과 요새가 되어 주시며, 우리를 이 세상 모든 환란과 사악한 마귀의 유혹과 흉계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때문이다.


윌리엄 바클레이가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는 틀림없이 응답된다.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간구한 그대로 응답된 체험을 가진 성도들이 너무도 많기에 이 문제에 대하여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 


문제는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액면 그대로 들어주시는 대신 다른 방법이나 형태로 응답해 주시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들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유용하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가 바라는 것을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가 간구하는 바를 다른 것으로 바꿔서 주시는 것은 그의 자녀 된 우리를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가 아주 응답되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불신자들이나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궤변이 어디 있느냐고 항변할지 몰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면 응답되지 않음으로 응답되는 기도야 말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넓고 큰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러나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구하는 모든 것이 다 우리 인생을 보람되게 하며, 그의 영광을 들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계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구해도 우리가 꼭 가져야 할 것들만 선택하여 주시거나, 우리가 가질 필요가 없는 것들은 아예 주시지도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응답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기독교 역사상 믿음의 기도가 아니기에 하늘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땅에 떨어진 기도는 많기만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의 기도는 간구한 그대로, 혹은 수정되어서, 아니면 들어주지 않으시는 세 가지 중 어느 형태로든 다 응답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된 본분을 다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시켜 드리는데 필요한 것인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우리의 모든 간구가 응답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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