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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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양과 염소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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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자리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을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31-46)

 

 

하나님은 인간이 받은 최초의 재판이었던 에덴의 법정을 주관하셨다. 인간이 받을 최후의 재판을 담당하실 재판관은 예수님이시다. 마지막 심판 날 판사석에 앉으신 예수님은 그 앞에 불러 모은 모든 족속들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오른편과 왼편에 갈라 세우신다. 그런 후 그들이 어째서 좌우로 갈라져 서게 되었는가를 말씀해 주신다. 


따라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최후의 심판이 선고되는 재판을 방청하며 예수님이 결정하시는 판결의 이유를 들을 수 있다. 동시에 예수님의 판결문 속에 포함된 구원의 원리와 구원받은 성도들이 지켜야 할 삶의 지침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천사들과 함께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다는 사실은 신약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마 16:27, 24:30; 살전 4:16). 그 예언의 성취대로 오실 예수님은 그 앞에 모여든 세상 모든 족속들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오른편과 왼편에 갈라 세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예수님의 최후의 법정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법정에서는 기소를 당한 사람들만이 재판을 받는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날 열리는 하나님의 법정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출두하여 재판을 받고 그 결과에 따라 생명의 길 또는 멸망의 길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법정에서는 변호사도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증거나 증인도 필요 없다. 공의로 판단하시는 전능하신 재판장 예수님이 우리들의 삶의 기록을 상세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진 사람들이 어째서 양과 염소로 비유되는 가하는 점이다. 양과 염소는 낮에는 함께 어울려 풀을 뜯지만 밤이 되면 갈라져야 한다. 인간 세상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함께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양은 찬 밤공기에도 견딜 수 있지만 염소는 추위를 타는 까닭에 밤에는 서로 몸을 맛 대고 체온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양과 염소는 함께 밤을 지낼 수 없는 것이다. 양의 하얀 털은 의를 상징하지만 염소의 검은 피부는 악과 연관된 것으로 여겨져 구약시대에는 염소의 머리에 불의를 올려서 광야로 보내졌다는 사실도 악인이 염소에 비유된다는 것과(레 16:20-22) 무관하지 않다. 


성경에서 오른쪽은 항상 선하고 의로운 것을 의미하는 반면 왼쪽은 악하고 불의한 것을 뜻한다. 그런 까닭에 오른편은 힘과 능력과 영광을 상징한다.


이런 연유들로 인해 예수님 앞에 모인 족속들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좌우로 갈라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인과 악인은 걷는 길이 다르고, 맺는 인생의 열매도 같지 않기에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시편의 가르침이다(시 1:1-6).


신약에서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간들은 종국에는 상반된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다. 알곡은 곳간에 보관되지만 쭉정이는 불에 태워지며(마 3:12), 곡식은 창고에 모아드리지만 가라지는 불사르며(마 13:30), 세상 끝날 천사가 의인들 중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진다.“(마 13:49-50)고 되어 있는 것이다.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영광의 자리에 앉으신 예수님은 오른편 사람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어째서 그들이 그처럼 영광스런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가를 들려주신다.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의 집으로 맞아드렸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간호해 주었으며,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와 주었기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이시다. 


그 말씀을 듣고 그들은 “언제 저희들이 그렇게 했습니까?”라 묻는다. 자기네가 예수님에게 그같이 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말씀하신다. 


그런 후 왼편에 선 자들에게 그들은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처럼 하지 않았기에 실격되었다고 알려주신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항의한다. 그때까지 예수님을 뵌 적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에게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말이다. 그들의 항변을 들은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간단하면서도 단호하게 답하신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못하면 영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밝히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의 지침으로 주신 십계명을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라.”로 압축하셨다. 예수께서는 그가 주신 이 새 계명에 근거하여 오른편의 사람들에게는 영생을, 왼편에 선 이들에게는 영벌을 선고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이 그가 처형당하신 십자가에 오르면서까지 하나님과 인간들을 사랑할 것을 기대하시는 것은 아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되풀이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들이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목마른 이에게는 물을 주며,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병든 자를 돌보고 위로하며, 감옥에 갇힌 자들을 찾아가 격려하며,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불우한 이웃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그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임을 일러주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이웃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천대하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을 적대시 한다면 예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다. 


지혜나 지식으로 그를 따를 자가 없었으며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율법학자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를 핍박하고 소탕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인생의 사명이라 굳게 믿었다. 그 인생의 몫을 완수하기 위해 기세 등등하게 다마스커스로 가는 바울 앞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바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 물으신다(행 9:4).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바울이 그가 증오하여 박해하고 죽이려 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아닌 “예수님“ 이심을 깨달은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마 22:37-39) 구원의 대열에 설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구원의 원리는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약 2:14-17)는 말씀을 상기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드리는 믿음을 지니면 하나님과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 이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 온갖 불치의 병으로 신음하며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병자들을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들의 구주로 믿는 믿음의 표현이요,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그런 사랑을 행하는 사람만이 최후의 심판 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예수님의 오른편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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