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189 전체: 519,714 )
예수님의 비유-깨어 있으라
daekim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막 13:32-37)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는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 12:35-40)

 

 

지상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며 예수님은 숱한 권능들을 행하시며, 많은 것들을 가르치시고, 세상 끝 날에 있을 징조들에 대하여도 말씀하셨다. 


마지막 때 즉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면서 일어날 여러 가지 현상들에 관해 들려주시면서 예수님은 여름이 다가오면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아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리스도”라 주장하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며, 곳곳에 지진과 기근이 발생하는 등의 현상이 생기면 그가 가까이 온 줄로 알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기에 그 날에 대비하여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뿐이라 일러주신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은 “비유”이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비하는 성도들의 자세를 확립시켜 주시는 주님의 분부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비유를 기록하면서 누가는 예수께서 “혼인집에 갔던 주인이 돌아오면 곧 문을 열 수 있도록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리라.”(눅 12;35-36)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이는 마가의 기록과 그 표현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복음서의 비유가 말해주는 요점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예수께서 돌아오시는 날에 대비하여 “깨어 있으라.”는 것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비유를 살펴보면 주인이 먼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기 일을 맡기는데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라고 네 번이나 당부한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서 “자는 것을 보지 않게 하라.”는 경고까지 할 정도로 “자지 말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주인의 지시는 준엄했던 것이다. 


주인이 그가 올 시간이 저녁일지, 밤중일지, 닭 울 때일지, 새벽일지 모른다고 한 것은 그 당시 로마군이 야간 경비병들의 근무상태를 네 번에 걸쳐 확인한 것이 그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집을 떠나면서 그가 언제 돌아오더라도 밤새워 병영을 지키는 군인들처럼 졸지 말고 집을 안전하게 지키라고 지시한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있어야 한다는 점이 마가복음보다 더 강조되어 있다. “너희는 허리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깨어 있으라.”는 비유의 시작이 이를 말해준다. “허리띠를 띠고 있다.”는 것은 당장이라도 여행길에 오를 수 있으며, 전투에 참여할 수 있으며(엡 6:14), 예수님이 어떤 분부를 하셔도 즉시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벧전 1:13) 의미하기 때문이다. 


“등불을 켜고 있으라.”라는 뜻도 처녀들이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등불을 밝혀 들고 있어야 함을(마 25:1-13) 상기하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마가복음에선 집을 떠나는 주인이 여러 종들에게 일거리를 나누어 맡기면서 특별히 문지기에게 그가 언제 오더라고 즉시 문을 열 수 있게 대기하고 있으라는 것이 주인의 강조점이다. 


이에 반해 누가복음에는 주인이 돌아오는 대로 문을 열고 그를 맞아드릴 뿐 아니라 그의 분부를 수행할 준비까지 갖추고 있으라는 임무까지 부과되어 있다. 이 두 비유에서 집을 나서면서 그가 돌아올 때까지 깨어 기다리라고 분부한 주인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 명령대로 졸지 않고 집을 지키다 주인의 돌아옴과 동시에 문을 열고 맞아드려야 할 종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 두 비유는 믿는 자들에게 그가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대로 다시 돌아오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 때까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두 비유에서 강조하고 계신 첫 번째는 그가 오실 날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가시며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그의 권한에 두셨다.”(행 1:17)고 그 자신도 돌아올 날을 모른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이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는 전제하에 순간순간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자세로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할 것을, 돌아오는 주인을 깨어있다 맞아드리는 복된 종들이 되라는 말씀을 통해 일러주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오실 예수님을 기쁘고 떳떳하게 영접할 수 있도록 깨어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살전 5:17)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따라서 기도의 사람은 결코 영적으로 메마르지 않으며 세상의 유혹에 현혹되지도 않는다. 기도하는 이들은 피곤에 못 이겨 잠 속으로 빠져들지도 않는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들었던 것은 그네들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도를 모르는 파수꾼은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성 위에 서있어도 침투하는 적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기 때문이다.”(시 127:2)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상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란 사실이다.(살전 5:18)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만 주님 오시는 날에 대비할 수 있는 또 다른 중대한 이유는 기도로 무장해야만 이 세상 악의 권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질서와 조화 속에 세상을 창조하셨다. 때문에 광대무변한 세상과 놀랍도록 신비하고 오묘한 자연의 질서와 법칙들을 바라볼 때 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름답기만 한 세상이 더러운 죄로 오염되고 사탄의 세력에 의해 지배당하면서부터 세상은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악의 수렁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죄로 더럽혀지고 얼룩진 세상 속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얽어 매려는 첫 번째 죄악의 사슬은 “육신의 정욕”이다. 성적인 유혹만을 이겨내면 이 무서운 사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세상을 향한 헤아릴 수 없는 욕망들과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주의적인 숱한 욕구들이 “육신이 정욕”에 해당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히면 인간 삶의 지침인 하나님의 계명이나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은 물론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까지도 우리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우리가 세상에 연연하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롬 12:2), 육신의 포로가 되지 않고 깨어있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눈에 띄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들과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몽땅 자기 소유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처럼 사탄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네가 보는 모든 것들을 다 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사탄의 친위병이 되어 충성할 수 있는 존재가 그네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에 간직하고 추구해야 할 진정한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과 변하지 않고 썩지 않는 심령의 아름다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벧전3:3-4). 이런 아름다운 마음의 자세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생의 자랑”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며 인생 자체를 주저하지 않고 투자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생의 자랑”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들을 얻든 못 얻든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은 파멸되게 되어 있다. 


우리의 헛된 욕망을 만족시켜 줄 것들을 손에 쥐는 순간부터 우리들은 죄악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고, 그것들을 얻는데 실패해도 주님 오시는 날 부끄럽게 빈손으로 그 앞에 설 수 밖에 없다. “이생의 자랑”을 성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노라 예수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며 우리의 힘과 용기와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다 문 두드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모셔 들어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