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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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혼인 잔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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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들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려 들어 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140)

 

 

“혼인 잔치 비유”는 “두 아들 비유”와 “포도원 농부 비유”에 이어 세 번째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 대제사장, 장로들의 타락상과 그들의 위선적인 삶을 지적함과 동시에 회개를 거부하는 그들에게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신 비유다. 


혹자는 이 비유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큰 잔치 비유”(14:15-25)와 같은 것인데 약간 다르게 기록되었을 뿐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두 비유가 유사하기는 하다. 그러나 “혼인 잔치 비유”와 “큰 잔치 비유”는 근본적으로 다른 별개의 것이다.


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해 성대한 혼인 잔치를 베풀기 원한다. 그는 잔치를 위한 모든 계획을 몸소 세운다. 일생에 한 번뿐인 아들의 결혼 피로연을 멋있고 의미 있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모든 준비를 끝낸 임금은 전국에 있는 저명인사들에게 임금의 인이 찍힌 초청장을 보낸다. 당시 왕실에서 내보내는 초청장은 신하들이 직접 배달했으며, 받는 이들 모두에게 큰 기쁨과 영광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초대를 받은 이들이 오기를 거부한 것이다. 임금의 초청장은 초대와 더불어 참여하라는 명령의 성격까지 띠고 있는 것이기에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은 임금에 대한 불충 내지는 반항이라 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임금은 포기하기 않고 계획대로 진행하여 산해진미로 잔칫상을 차린 후 두 번째로 신하들을 보내 잔치에 참여해 달라 청한다. 그러나 전보다 더 심한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어떤 이들은 들에 나가 일해야 한다며, 또 다른 이들은 장사한다는 핑계를 대며 불참할 것을 통보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임금의 사자들을 때리고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임금은 진노하여 그의 사자들을 박대하고 살해한 자들을 색출하여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사른다. 동시에 신하들을 전국 각지로 보내어 왕실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원하면 누구나 오라고 알린다. 그 결과 연회장은 원근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 찬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임금은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예수님이시다. 처음 두 번에 걸쳐 초청장를 전달한 신하들은 선지자들이고, 세 번째로 임금의 명을 사람들에게 전한 이들은 열두 사도를 비롯하여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땅 끝까지 달린 초대교회의 성도들이라 볼 수 있다.


처음 두 번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들은 유대인들이며, 세 번째 초대를 받고 왕실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비유를 다시 음미하면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임금의 초대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받아드리는 대신 단호하게 거절해 버린 것이다. 


세상의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연약하고 별 볼일 없는 그들을 택하시어 눈동자처럼 아끼고 지키시며 인도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야비한 배신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거나 벌하지 않으시고 그의 품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평안과 특권이 무엇인가 들려주시며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임금이 두 번째로 신하들을 보내 잔치의 풍성함과 즐거움을 말해주며 오라고 권유한 것이 그것이다. 놀랍게도 두 번이나 청함을 받은 이들 중 태반이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또는 사업 때문에 바쁘다며 오기를 거부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상당수가 못 간다는데 왜 귀찮게 구느냐며 왕의 사자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살해한 그들의 조상과 똑 같은 죄를 범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악행을 지적하며,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으니 임금이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사자들을 해친 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거처를 불사른 것이 그것이다. 


이는 주후 70년에 로마 장군 디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파괴한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것이 주후 80년에서 90년 사이이니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가 직접 목격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혼인 잔치 비유”에 반영했을 수도 있다.


그의 초대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신하들의 목숨까지 빼앗은 무지하고 완악한 무리를 왕권을 발휘하여 처벌한 임금은 세 번째로 사람을 보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아들의 혼인 잔치에 오도록 한다. 


유대인들이 외면한 천국복음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복음의 혜택을 받으리라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죄인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받기를 거부한 복음을 이방세계에 전하므로 이방인들을 구원함과 동시에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미치는 것을 보며 유대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인류구원 계획이심을 잊어선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로마서 11장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으며, 특별히 22절과 23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제시했던 복음을 이방인에게도 들려주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다시 말해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원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임금의 사자들이 사방에 다니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전한 결과 혼인 잔치는 대성황을 이루게 된다. 사람들로 가득한 잔치 석상에 들어서서 흐뭇한 마음으로 장내를 둘러보던 임금의 눈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 당시 그 같은 연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예복을 입게 되어있었다. 예복은 그때 동방사회에서 기쁨과 행복을 뜻했던 정결하고 하얀 천으로 만들었으며, 그것을 입어야만 빈부와 귀천의 차이 또는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가 초대 받은 손님으로서 잔치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이 평상 복장으로 잔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그에게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고 묻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임금은 시위대에게 “그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라 명한다. 


초대에 응해 참석한 손님을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임금이 밖으로 내어 쫓은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거기 온 사람들은 모두 갑자기 청함을 받았기에 입은 차림 그대로 왔을 것이다. 그러기에 입구에서 모두에게 깨끗한 예복을 입게 하여 연회장에 입장시켰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왕실의 법도와 호의를 무시하고 입은 옷 그대로 들어왔느니 왕실을 모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서 어둔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진정한 이유는 그 자리가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었다.


구원은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선물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의 대열에 서려면 참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음을 상징하는 의의 옷(예복)을 입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평소 복장으로, 다시 말해 그 자신의 의의 옷을 입고 구원받은 성도들 틈에 끼어 앉았기에 쫓겨나서 어둠 속에서 슬프게 울 수밖에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겔 18:23, 33:11),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여”(벧후 3:11)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께서 입혀주시는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야만 그 같은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이 비유를 마치시며 예수께서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청함을 받고도 예복을 입지 않아 택함을 받지 못하는 슬픈 운명을 맞지 않는 우리들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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