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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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여리고에서 맹인을 고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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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다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 하라’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 46-52)

 

 

예수님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리고에 들렀다 떠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나섰다. 초막절, 오순절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삼대 명절 중의 하나인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서 24키로 내에 거주하는 열두 살 이상의 남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길에 나와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격려하며 전송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예수님 일행처럼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보내는 인파로 여리고 주변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같이 많은 사람들이 들끓는 틈에 바디매오라 이름 하는 맹인이 앉아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맹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나 성문 앞에서 구걸을 해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주위가 어수선해 지면서 “나사렛 예수가 오신다.”란 소리가 들리자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 소리친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들에 관해 들어서 알고 있었던 바디매오는 그가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믿고 소리 높여 예수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 중 아무도 그 가련한 맹인을 주님께 데려가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다. 


불쌍한 중풍병자를 들것에 눕혀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사람들이나(마 9:1-8),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나올 수 있도록 도운 것(마 12: 20-28)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이 눈 뜨기를 원하는 가련한 맹인을 동정하기는커녕 그가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막은 것은 잘못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 같은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데는 그들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다. 그 당시 성지순례를 가는 사람들은 같은 마을에 살거나 친한 친구들이 함께 어울려 가곤 했다. 


그런데 오늘 날과는 달리 그들은 길을 가면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니라 랍비들의 말을 들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기네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전으로 향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때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도 그들이 선택하는 랍비들의 말을 들으며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좌우와 앞뒤로 에워싸고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리에서 구걸하는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께서 오시는 방향을 향해 그를 도와달라고 소리 높여 외쳐댔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떠들지 말고 잠잠 하라.”며 화를 낸 것이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사람들의 말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더욱 소리를 높여 “다윗의 자손이여,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 계속하여 외쳐댔다. 


그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성한 사람들처럼 자유로이 예수님을 찾아가 만날 수 없는 그에게는 예수께서 그의 앞을 지나시는 그때가 눈을 뜰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사람들의 나무람 같은 건 들은 척도 안하고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은 것이다. 많은 것 같지만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뱉어버린 말은 주어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놓쳐버린 기회가 다시 온다는 보장은 없다.


사도 바울이 철학의 도시 아덴에서 복음을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대신 후에 기회가 있으면 “네 말을 다시 듣겠다.”(행 17:32)며 발길을 돌렸다. 그때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룬” 그들은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외면한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영원히 암흑의 세계에 머물러야 한다고 확신한 바디매오는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불렀고, 예수께서는 그런 그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를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 앞으로 나간다. 앞을 못 보는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민첩한 행동이었다. 이 점을 지적하며 바디매오는 맹인 행세를 하며 구걸하던 걸인이었거나, 시력이 약했던 사람이라며,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맹인이 성한 사람처럼 빠른 동작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 빛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음을 의미한다. 우리들도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순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원하시는 그릇이 되어 그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망설이며 하던 일 끝내고 하겠다는 것은 주님의 동역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증거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 또는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서” 그리하겠다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말씀하셨다.(눅 9:57-62)


구걸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뛰어 그의 앞으로 나온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 그렇게 물으신 것은 눈 뜨기를 갈망하는 그의 소원을 그에게서 직접 듣고, 그가 예수께서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바디매오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라 답한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소원을 회상하곤 한다. 


김구 선생은 그의 자서전 백범 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나의 소원은 대한독립입니다.”라 대답할 것이다. 두 번째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셔도 “우리나라의 독립입니다.”라 대답할 것이며, 세 번째 소원을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입니다.”라 대답할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물으시면 주저하지 않고 아뢸 수 있는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소원을 가슴 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해서 그의 뜻대로 역사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가 원하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라고 바디매오가 아뢰자 예수님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라 말씀하셨고, 그의 앞에는 광명한 세상이 전개되었다. 눈 뜨기를 바라는 애타는 소망과 그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는 믿음을 소유했던 바디매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그가 받을 수 있는 인생 최대의 선물을 받은 바디매오가 보인 반응은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이었다. 예수님의 권능과 사랑으로 나병으로부터 해방된 열 명 중 자기들의 길을 가버린 아홉과 달리 그는 예수님의 길을 따른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가서 유월절을 지킨 후 평범한 서민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눈 뜬 후 바디매오의 삶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지만 그가 보게 된 후에 자기의 길을 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정상적인 눈을 지니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캄캄한 곳에서 비참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만 보며, 인간으로서 행하여야 할 것들을 보면서도 못 본 척 눈을 감거나, 이웃의 슬픔과 불행과 아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시야를 지닌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말씀하셨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줄 안다. 우리가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시야를 지녔다면 즉시 예수님 앞에 나아가 “주님, 바로 보게 해 주십시오.”라 간구해야 하겠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맡겨진 인생의 사명을 완수하며 후회 없이 살다 예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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