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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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귀신 들린 벙어리를 고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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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하되,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하더라.” (마 9:32-34)

 

여기 수록된 예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기적은 12장에 기록된(22-24)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두 기적은 같은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 당시 유대지방에는 많은 종류의 병자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비슷한 증세를 가진 병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오는 각종 병자들을 다 고쳐주신 예수님은 여러 명의 맹인, 벙어리, 절름발이들을 고쳐주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사한 병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낳게 해주었기 때문에 마태복음 9장과 12장에 나오는 벙어리가 동일 인물이라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9장의 귀신 들린 사람은 말만 못했지만 12장의 벙어리는 눈까지 먼 것을 보면 둘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는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후 밖으로 나오시자 사람들이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날 때부터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아니면 두 가지 장애를 다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은 말만 못했으며, 그렇게 된 까닭은 악령에게 사로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는 여러 가지 질병들이 악귀들과 연관되어 있었기에 이 경우도 그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괴롭히던 귀신을 쫓아내신다. 어떤 방법을 쓰셨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는 순간 그는 즉시 말하기 시작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들이 벙어리가 말을 시작하는 것을 보며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여 하는 말에 주위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라든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은 본 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놀라면서 감탄한 이유는 예수님에 의해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임과 동시에 그들이 기다리던 진정한 메시아가 출현한 것을 인정해서인 까닭이다. 


그들은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인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 이야말로 “맹인을 보게 하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절름발이를 뛰게 하며, 벙어리를 말하게 할뿐 아니라 광야에서 물이 솟구치게 하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메마른 땅에 샘물이 솟게 하며, 이리가 살던 곳에 갈대와 풀이 자라게 하실 메시아”(사 35:5-7) 이심을 믿게 된 것이다.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몰아낸 행위 하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사랑과 권능으로 충만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인식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보여준 사역을 통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을 직접 보고 체험함으로 그가 누구신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전령이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령이었다. 하나님의 전령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선포하셨다. 아울러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확실하게 안내해 주셨다. 천국이 가까워 왔음을 알림과 동시에 그 곳으로 향할 수 있는 정확한 이정표가 되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성 문을 향해 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가르치시며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다 고쳐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 아닌 행위로 보여주신 것이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께서는 하늘의 진리를 전파하며 가르치신 것보다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 낙망하고 좌절한 무리들을 위로하며 일으켜 주시는 일을 더 많이 하셨다. 기독교의 교리를 사랑의 실천을 통해 가르치신 것이다. 


제사장들은 제사의 중요성을 그 형식과 방법에 중점을 두어 가르치며 백성들을 지배했으며, 서기관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본분임을 강조하였고, 바리새인들은 자기네의 의를 본받아 사는 것이 참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행하는 믿음”을 지녀야 하며,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려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흩어져 방황하며 고생하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며 돌보셨다.”(마 9:36) 


예수님이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그도 함께 느낀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불치의 병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의 구덩이에서 허덕이는 그들이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의 슬픈 사연을 알게 되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예수님이 나인 성 입구에서 장례 행렬과 마주쳤을 때 그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아들의 관을 뒤따르는 과부의 기막힌 슬픔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녀에게 가까이 가셔서 “울지 말라.” 위로 하시고, 그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그 여인의 눈물을 닦아주신 것이다.(눅 7:11-17)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신 분도 예수님이시다(마 15:32-39). 인간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 당하여 외롭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나병 환자를 보았을 때도 예수님은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어 그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하셨다(막 1:40-45).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이 살 길을 열어주어야 할 유대의 위정자들은 그들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을 지니고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까지 민중들이 힘겹게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네들이 지닌 종교적 권위를 무기 삼아 백성들을 억압하며 그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했던 것이다. 


이런 혼란과 암흑의 시기에 그 모습을 드러낸 예수님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서민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사역을 지켜보며 위로 받으며 희망을 가지기 시작한 그들이었기에 예수께서 악귀를 쫓아내시고 벙어리의 말문을 여시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며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출현했음을 인식한다는 반응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똑같은 것을 목격한 바리새인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예수님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들것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서기관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다. (마 9:3)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다(마 9:11). 이번에는 악령에 의해 벙어리 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의 권능을 사탄의 힘에 의한 것이라 단정하는 엄청난 죄를 범한 것이다. 어째서 유대의 종교 지도자란 그들이 이처럼 무지하고 악랄한 발언을 한 것일까?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 임무라 믿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네가 만든 율법준수세칙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것을 말하고, 행하면 죄로 간주했다. 그러기에 모든 면에서 그들과 달리 새롭고 혁신적인 예수님은 그들에겐 죄인인 동시에 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의로운 그들과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을 그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그들을 가리켜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위선자로 여기며, “독사의 자식”이라 부르는 예수님을 극도로 증오하였던 것이다. 그네들이 예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행위가 “사탄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 결론지은 까닭은 이런 사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랄한 의도를 지닌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아무런 반격도 가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에게 주어진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길을 가셨을 뿐이다.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은 이 같은 예수님의 자세를 본받지 않으면 안 된다. 


사탄은 예수님께 충성하기로 결단한 십자군의 정병들을 예측할 수 없는 갖가지 교묘하고 악독한 방법으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탄의 도전을 받을 때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갈 6:9)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전 15:58)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약속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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