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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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시다
daekim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그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시니, 제자들이 여쭈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편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25-34)

 

예수님이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신 기적은 예수께서 병들어 죽게 된 딸을 살려달라는 회당장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났다. 그때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 속에 12년간 혈루증으로 고통 당하던 여인이 있었다. 혈루증이란 “자궁의 만성 하혈증으로 자궁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칙적으로 피가 흐르는 증세”를 말한다. 


그 당시에는 유출병이라 알려졌으며, 부정하고 불경하게 여겨져 이 병에 걸린 여인은 예배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레 15:19-31). 


따라서 군중들 틈에 끼어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슬프고 외롭게 살 수밖에 없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중풍병자와 달리 마음대로 다니며 활동할 수 있으면서도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못하며 사람들의 멸시와 경멸의 눈길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혈루증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들을 찾아 다니며 치료를 받느라고 온갖 고초를 다 겪었고, 가진 재산도 다 써버렸으나 낫기는커녕 오히려 병은 악화되었다. 그 시대에 혈루증을 고치기 위해 약초를 먹거나 여러 가지 미신적인 방법을 포함한 11가지나 되는 치료법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효과 여부를 떠나 받기 힘든 치료방법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 다니며 좋다는 것은 모두 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마가는 의사들을 조롱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하지만 의사였던 누가의 복음서에는 그녀의 병이 더 악화되었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았지만 병이 더 깊어지기만 하자 삶을 포기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그 여인은 예수님에 관해서 듣게 된다. 어떤 병이든 고칠 수 있는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이 멀지 않은 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예수님 앞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혈루증을 앓고 있기에 예수님에게 접근하여 고쳐달라고 간청할 수 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과 섞이는 것조차 그녀에겐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쉽사리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는 악조건을 기회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그 여인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만진 것이다.


그 당시 유대 남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뒤편 네 모서리에 장식이 달린 겉옷을 입었다(민 15:37-41). 여인이 만진 예수님의 옷자락은 그 네 개의 장식 중 하나였다. 


얼핏 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 같지만 그녀가 그렇게 한데는 중대한 까닭이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 여자가, 그것도 이방여자가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녀는 가이사라 빌립보 출신의 이방여인이었다고 한다.) 남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예수님의 뒤에서 그의 옷을 만진 것은 그렇게만 해도 그녀의 인생을 파탄시키는 혈루증이 깨끗이 나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일은 더더욱 없는 그녀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인의 믿음은 즉시로 열매를 맺어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순간 오랜 세월 그녀를 괴롭혀 온 혈루증은 깨끗하게 치유된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그에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느끼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물으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를 지니신 분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권능을 행사하셔서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하지만 혈루증 앓는 여인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그 권능을 행사하시기 전에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순간 예수님의 권능이 행사되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느끼신 것이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혼잡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 반문했지만 예수님은 누가 그랬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신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권능에 힘입어 혈루증을 고치려 했던 여인은 자신이 한 일을 숨길 수 없음을 깨닫고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것을 고백한다. 예수님은 그녀를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으시고 사랑이 가득 담긴 자비로운 음성으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 말씀하신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여자를 ‘딸’이라 부르신 것은 여기뿐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예수님이 그녀의 믿음을 얼마나 귀하고 장하게 여기셨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이어서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신 것은 그녀의 혈루증이 완치된 것은 오로지 그녀의 믿음 때문임을 확인시켜 주심과 동시에 그녀의 영혼도 깨끗해졌음을 일러주신 것이다. 들것에 실려 지붕에 뚫은 구멍을 통해 밑으로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심으로 그를 영육 간에 새롭게 해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여인도 육신을 온전케 해주심과 동시에 영혼까지 구원하시는 은총을 내려주신 것이다.


더 나가가서 이 여인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까지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받는다. 모두가 천금보다 귀한 그녀의 믿음이 가져온 결과였다.


12년 이란 긴 세월 동안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며 살아야 한 여인에게 새로운 인생의 막이 열린 기적은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났다. 그것도 많은 무리가 서로 밀고 밀리는 와중에서 말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평안히 가라.”고 축복하시는 장면에서 우리는 혼잡한 세상이나 주위에 운집한 수많은 군중들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존귀하신 예수님이 낮고 천하며 불치의 병으로 고통 받는 한 여인에게 그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시는 장면만을 목도하게 될 뿐이다. 


 그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그와 같이 대해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낮고 비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멸시와 경멸과 천대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신분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우리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셔서 보살펴 주시며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문제를 지녔을지라도 예수님의 품에 안기면 누구든지 참된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1912년 4월 15일 새벽에 호화찬란한 세계 최대의 여객선 타이탄익 호가 빙산에 부딪쳐 대서양 깊은 물속에 가라앉았다. 1,6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엄청난 해상사고이며 세기의 비극이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 뉴욕의 신문 중 ‘The American’은 기사의 초점을 타이탄익 호의 침몰로 사망한 백만장자 John Astor에 맞추었다. 1,600여 명의 승객들도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간단하게 기사의 끝 부분에 언급되었을 뿐이었다. 그 신문은 숱한 인명과 천문학적 숫자의 재산 그리고 화려하고 큰 여객선의 손실보다 한 백만장자의 죽음에 더 큰 비중과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처럼 귀중한 것은 없으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방황하는 한 영혼이 그에게 돌아오는 것을 무엇보다 기뻐하시며, 창가에 기대시어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떠날 때 일어나며, 우리가 예수님에게 돌아올 때 그 모든 문제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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