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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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시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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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요 9:1-12)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이끌려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묻는다. 유대사회의 지도자로 자처하며 권위의식이 누구보다 높았던 바리새인들이 거리에서 구걸하던 사람에게 직접 심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한 죄로 기소하려면 그의 진술이 필요했기에 그들에게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의 증언은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게 되었습니다.”라는 간단명료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두 개의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안식일에 일을 했으며, 목숨을 잃을 염려도 없는 소경을 고쳤으니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정한 안식일에 관한 법을 적용한 결과였다.


또 다른 의견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소경의 눈을 뜨게 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바리새인들의 입장이 몹시 난처해졌다. 그들 내부에서 분쟁이 생긴 이상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한 죄인으로 단정하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그들은 “네 눈을 뜨게 한 사람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평소 같으면 면담조차 하지 않을 사람에게 그들의 분열된 생각을 좁힐 수 있는 해답을 묻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질문을 받은 걸인은 주저하지 않고 “그분은 선지자입니다.”라 대답한다. 그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을 최대로 높인 표현이었다. 그때까지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있었던 그에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놀라운 기적들을 행한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로부터는 그들이 원하는 증언을 얻을 수 없다고 여겨 그의 부모를 소환한다. 그 사람의 부모는 눈을 뜬 소경이 그들의 아들임을 시인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대답을 회피한다. 예수님이 소경인 아들을 고쳐주셨다고 실토하면 출교 당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 9:22).


 ‘출교’란 유대사회에서 축출당하는 것이며,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출교를 당하게 되면 유대인으로서의 신분과 직위를 잃게 되어 유대사회에서 발부치고 살기가 힘들어지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 특히 상류층에 속하는 이들에게 출교는 무서운 형벌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회당에서 출교 당하는 것이 두려워 말을 못할 정도로 출교는 바리새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요 12:42).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눈을 뜨게 된 과정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그의 부모는 “우리 아들이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라 말한다.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이 자기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당당하게 말한 아들에 비하면 약하고 비겁한 느낌까지 들지만 그들의 답변은 바리새인들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고, 그들이 더 추궁할 수 없는 합법적인 것이었다.


또다시 난처해진 바리새인들은 눈 뜬 소경을 다시 부른다. 그들은 재 소환되어 온 아들에게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라 말한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이름 앞에서 진실을 말하라는 뜻이다. 아이 성 공격에 실패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수 7:19)했던 것을 상기하면 이 사실은 더욱 명백해 진다.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같은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다르다. 여호수아는 아간이 그의 범죄행위를 솔직히 고백할 것을 종용한 것이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임을 입증하려는 그들의 계획에 동조하라는 일종의 협박이었기 때문이다. 


눈뜬 소경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 “난 그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소경이었던 내가 지금은 보는 것입니다.”라고 말이다. 아무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지극히 논리적이며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긴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음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 확신한다. 


불학무지한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는 순간 바리새인들은 크게 당황한다. 계속하여 그가 “세상이 생긴 이후로 지금까지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고, 이분이 만일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런 일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라 말하자 그들은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한 말은 하나님은 악인과 함께 하지 않으며,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는 구약의 진리에 근거를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욥 27:9; 시 66:18, 34:15, 145:19; 사 1:15; 겔 8:18). 궁지에 물린 바리새인들은 “죄 가운데 태어난 네가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고 화를 내며 그를 쫓아내 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바리새인들이 눈뜬 소경을 “죄 가운데서 태어난 주제”라고 모욕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했다는 사람은 실상은 소경이 아니었다고 조작하려던 그들의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예수님은 출교 당한 사람을 찾아가신다. 38년이나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물이 동할 때를 기다리던 전신마비 환자를 찾아가신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 다가간 예수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고 묻자 그는 “주여, 누가 그분이십니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믿겠습니다.”라 대답한다. 예수님은 “너는 이미 그를 보았느니라. 지금 너와 말하는 내가 그이니라.” 들려 주신다. 그러자 그는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며 예수님께 경배한다. 


어둠의 세계를 벗어나 광명한 세상에 들어선 그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의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이 같은 놀라운 변화는 그가 예수님을 ‘예수라는 사람’에서 ‘선지자’로, 그리고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는 믿음의 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그에게 경배하는 눈뜬 소경에게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려 함이라.”말씀하신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어둠에서 벗어나 찬란한 빛 가운데 살게 되지만 빛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거나 배척하면 육신의 눈을 떴을지라도 영원히 어둠 가운데 살 수밖에 없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그러면 우리가 소경이란 말입니까?”라 항의한다. 그들이야말로 생명의 빛을 받아드리기를 거부하고 암흑 속에서 멸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한 반응이었다. 성한 눈을 가지고도 그들의 추악한 모습을 보지 못하는 소경임을 고백한 것이기 때문이다.


빛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다.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캄캄한 세상을 환하게 밝히셨으며, 소경으로 태어나 암흑 속에 앉아있는 소경의 눈을 밝혀주셨다. 그는 밝아진 눈으로 광명한 세상을 보며 빛 되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건전한 육안을 지닌 바리새인들은 어둠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빛이신 예수님을 대항하며 밀어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빛은 온 세상을 골고루 비추신다. 그 빛을 받아드리느냐, 안 받아드리느냐는 우리들의 선택이다. 선택에 대한 책임과 대가도 우리들의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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