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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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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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이 음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요 5:1-9)

 

 

 사도요한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세 번째 기적은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 것은 유대인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라 추정된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베데스다 연못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고, 거기엔 많은 병자, 맹인, 절름발이, 손발이 마비된 사람들이 즐비하게 누워있었다. 그 까닭은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곤 하는데 그때 제일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병이 무엇이든지 낫는 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왜 그 곳에 가셨을까?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이들이었다. 따라서 베데스다 연못은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온갖 문제들과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로 들끓는 인간 세상을 상징한다. 그 곳에 예수님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죄의 사슬에 묶여 신음하는 인간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였다. 


 베데스다 연못에 당도하신 예수님은 거기 있는 수많은 병자들 사이를 걸어가시다 움직이기조차 못하고 누워있는 한 병자 앞에 멈춰 서신다. 그는 전신이 마비된 중환자로서 38년 동안 거기서 병 고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자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시며 예수께서 물으신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째서 거기 있는 많은 병자들 중에서 그에게 다가가 그렇게 물으신 까닭을 알아보아야 한다. 38년이나 된 병자이니 그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부터 거기서 그가 일착으로 물에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예수께서도 그 사실을 아셨음은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란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병자 자신은 그에게 물에 제일 먼저 뛰어들 행운이 올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낫기를 바라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곳에 계속하여 남아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한 그를 예수님이 찾아간 까닭은 자명하다. 불구의 몸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외롭고 쓸쓸하게 이들을 위로해 주시고 일으켜주시는 분이 구세주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병자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 물었을 때 병자는 그가 누구인지 조차 몰랐다. 


 그러나 너무도 듣고 싶었던 말이었기에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호소한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명하신다. 황당한 말이었다. 몸이 마비된 채 38년이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그에게 일어나 걸어 가라고 헸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그 병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거둬 들고 걸어갔다.”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 평생을 누워만 있던 전신마비 환자에게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이 놀라운 사건은 “일어나 걸어가라.”라는 예수님의 “명령”과 그대로 한 병자의 “순종”의 결과였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창 1:3) 말씀하시니 빛이 나타난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방식대로 명령을 통해 권능을 행하신다.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도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막 2:11)하셨고,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일어나게 하여 “네 손을 내밀라.”(막3:5)명하여 온전하게 하셨으며, 나사로를 살리실 적에도 그의 무덤 밖에서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언제나 약속을 동반한다. 아브라함을 인류최초의 선교사로 파견하실 때도 그랬고,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명 하시면서도 “내가 너를 건지겠다.”란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시 50:15)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마 6:33),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명령형의 초대를 하면서 “그러면 너희에게 참된 쉼을 주겠다.”하신 분도 예수님이신 것이다.(마 11:28) 


 이는 예수님의 명령은 곧 그의 약속임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예수님은 명하신 것을 반듯이 주시며, 주실 것만을 명하신다.”라 말해준다.


 38년 된 병자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함으로 그의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일어나게 한 병자의 믿음에 관해서 요한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은 불치의 병을 고치실 때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도 말이다. 이 점을 지적하면서 믿음은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베데스다 연못의 기적은 병자의 믿음과 관계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누워있는 그에게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었을 때 그 병자는 “이 분을 그냥 가게하면 나의 인생은 끝이다.”란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매달린다. 영원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그를 일으켜 달라며 그의 삶 전체를 예수님께 맡기는 믿음을 나타난 것이다.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명하셨고, 그가 실행 불가능한 그 명령에 따름으로 일어난 것이 베데스다 연못의 기적인 것이다.


 이 같은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은 참으로 뜻밖의 것이었다.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에게 영광 돌린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인간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신 기적을 “안식일을 범한 행위”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병자를 고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 바리새인들로 추정되는 유대인들이 이것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누었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사람에게 안식일에는 물건을 들고 갈 수 없음을 모르느냐고 문책한 것이다. 


 그네들이 안식일에는 짐을 운반하지 말라는(렘 17:21; 느 13:15) 예레미아와 느헤미아의 말에 의거하여 강하게 나오자 그는 “나를 낫게 한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답한다. 혹자는 그 사람이 바리새인들이 모든 책임을 예수님에게 전가시키려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를 위해 권능을 행하신 분의 말대로 하는 것이 어째서 나쁘냐?”는 항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안식일에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그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 한 것을 알게 된 바리새인들을 그때부터 예수님을 제거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창조행위를 중지한 날이지 인간을 향한 자비와 사랑의 행위까지 멈추신 날이 아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선한 일은 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며 그 자신 그것을 실천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완악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안식일에 기적을 행했다고 그를 정죄하고 증오했으며 끝내는 그를 십자가로 보내는 엄청난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온몸이 마비된 병자가 그의 인생을 파탄시킨 병마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38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었지만 그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째서 일까? 예수님이 그에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의 곁으로 오셔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물으시며,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에 그가 순종했을 떼 그는 38년이나 그를 묶고 있던 병마를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늘 날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찾아와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계시다. “나는 아무 병도 없는 건강한 사람입니다.”라 말하지 말자. 예수님의 질문은 “너는 죄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온전하게 되며, 너를 괴롭히는 인생의 모든 문제들로부터 해방되어, 내 안에서 새롭게 되어 광명한 천국을 향해 걸어가고 싶지 않느냐?”라는 사랑의 권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인자하신 음성을 못 들은 척 흘려 보내지 말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나를 온전하게 해주십시오.”라 간청해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기쁨과 소망 속에 살아가게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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