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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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왕의 신하 아들을 살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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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있다.‘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요 4:46-54)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두 번째 기적은 병들어 죽게 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것이다. 이 기적을 마태복음(8:5-13)과 누가복음의(7:2-10)에 기록된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요한이 말하는 기적은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것과 다른 것이다. 그들 사이에 같은 것은 예수께서 환자가 있는 현장에 가시지 않고 먼데서 고치셨다는 것뿐이고, 병자의 신분이나 병명, 기적이 행해진 장소 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나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유대지방을 두루 다니시다 가나로 다시 돌아오셨을 때 왕의 신하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찾아와 “내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고쳐주십시오.”라 간청한다. 그 신하는 예수님이 가나에서 행하신 기적에 대해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아들이 고열로 사경을 헤매게 되자 먼 길을 달려와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구한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말씀하신다. 이 같은 예수님의 반응은 기적이나 이적을 직접 보아야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유대인들의 연약한 믿음을 책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포기하지 않고 더욱 간절하게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가버나움으로 와 주십시오.”라며 머리 숙인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신다. 왕의 신하가 원하던 답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의 아들이 병마로부터 해방된 것을 믿었다. 그러기에 주저하지 않고 가버나움을 향해 발길을 돌린 것이다. 가는 도중 가버나움에서 그를 찾아오던 하인들을 만나 아들에게서 열기가 사라진 시간이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있다.”라 말씀하신 때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달려가 그간 일어난 일들을 말하고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 


 죽음의 문턱에 섰던 왕의 신하 아들을 살린 예수님의 기적으로부터 우리가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믿음의 의미”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해 드려야만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요 1:12, 3:14-16, 4:42) 하지만 왕의 신하의 아들을 위해 행하신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직접 가버나움에 가시지 않고 32키로나 떨어진 가나에서 말씀으로 기적을 행하신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같은 그의 놀라운 권능행사는 예수님은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날에도 예수님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숱한 기적들을 베풀고 계시다. 그의 음성을 직접 듣거나 그와 얼굴을 마주 본 일도 없는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두 번째 기적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도 보여준다. 왕의 신하가 그의 아들을 고쳐 달라 간청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만 믿는다.”고 책망하셨다. 그가 베푸시는 놀랍고 신기한 기적을 보고 그에게 나오는 믿음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에는 미치지 못함을 지적하신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한다. “이번 난국만 타개해 주신다면”, “이 불치의 병을 고쳐만 주신다면”, “우리 아이를 좋은 대학에 입학시켜 주신다면”, 등의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 주신다면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주의 일에 힘쓰겠노라고. 


 이런 조건들을 내세우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이들의 믿음을 진정한 믿음이라 보기 힘들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의 우리의 구주이시며, 그가 하신 모든 약속은 반듯이 이루어 질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믿음은 예수님에 의해 행해지는 기적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권능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그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왕의 신하가 “네 아들이 살아있으니 돌아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려 즉시 어렵게 왔던 길을 되돌아 간 것처럼 말이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의 권능은 “믿음의 의미”와 “믿음의 본질”과 더불어 “믿음의 성장”에 관해서까지 밝혀 주고 있다. 왕의 신하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한 예수님이 그의 아들을 살릴 수 있다고 믿고 가나까지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그의 마음에 믿음의 씨앗이 뿌려진 탓이다. 


 아들을 살려달라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표적만을 보고 믿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나무랐지만 물러서지 않고 매달리는 그에게 예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하자 그는 그 말씀대로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을 믿는다. 그의 가슴에 뿌려진 믿음의 씨가 싹트고 자라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믿음은 그 자신과 온 집안을 구원으로 이끄는데 까지 성장한다. “그와 그 온 집안이 믿으니라.”란 요한의 기록이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살아있는 믿음은 성장하여 꽃 피고 열매 맺게 되어있다. 왕의 신하의 믿음이 자라나는 과정에서도 이 사실은 선명하게 들어나는데, 스펄전 목사는 그것을 네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해 준다. 


 첫 번째 단계는 그의 마음에 생겨난 “믿음의 불꽃”(The spark of faith)이며, 그것이 그로 하여금 30킬로가 넘는 길을 달려와 “주님,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내 아들을 살려주십시오.”라 간청하게 만든 것이다. 약하긴 했어도 이 믿음의 불꽃이 아니었다면 왕의 신하라는 높은 지위에 있는 그가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 예수님을 만나려 하룻길을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 단계는 반짝하는 “믿음의 불꽃”이 “믿음의 불”(The fire of faith)이 되어 타오른 것이다. 애타는 마음으로 드린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반등은 싸늘하고 냉정했지만 그는 더욱 절실하게 아들을 살려달라고 매달린다. 


 이 장면은 시리아군 총사령관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치료받기 위해 엘리사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는 나오지도 않고 하인이 문을 열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왕하 5:10)하자 그는 분노한다. 그리나 참고 요단강으로 가 몸을 씻어 깨끗함을 입었던 일을 생각나게 한다. 불티가 불이 되고, 타오르기 시작한 불이 “믿음의 불기둥”(The flame of faith)이 되는 단계까지 그의 믿음이 자라난 것이다. “네 아들이 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드린 것이 그 증거다. 


 믿음이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되어 기쁘고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왕의 신하가 죽어가는 아들로 인해 답답하고 무거운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았지만 “그가 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를 억누르던 감당하기 힘든 근심의 짐을 벗어버리고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갔듯이 말이다.


 집에 들어선 왕의 신하는 죽을병에서 완전히 회복된 아들과 그를 반기는 가족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데 이것이 스펄전 목사가 말하는 믿음의 최고봉인 “세상을 밝히는 믿음”(The conflagration of faith)이다. 


 왕의 신하의 믿음이 이처럼 높은 지경까지 이르게 된 원동력은 그가 드린 간절한 “믿음의 기도”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 안다. 예수님을 만나면 아들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주님을 찾아와 “간구”했으며, 그런 불완전한 믿음으로는 힘들다는 예수님의 나무람을 들으면서도 계속하여 간청한 그의 끈덕지고 간절한 기도가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는 예수님의 응답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말씀만으로 먼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신 예수님의 권능행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며,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알리는데 제일 큰 목적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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