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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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원수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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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나음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 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마 5:43-48)


 악인들의 횡포 앞에 잠잠하며 그들의 핍박과 박해를 감수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역시 이에 못지않게 어렵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악인에게 대항하지 말며,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다. 따르고는 싶지만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실천하기 힘든 악인에게 대적하지 말되, 원수는 사랑하라고 예수께서 명하시는 것은 이 두 가지를 실행할 수 있어야 그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인용하신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유대의 랍비들이 모세의 율법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재편집한 것이라는 사실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 모세의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레 19:18)인데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빠졌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추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에서 “네 자신 같이”를 삭제한 까닭은 “이웃 사랑”의 정도를 자신들 편리할 때로 조절하기 위함이었다. “네 자신 같이”를 빼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해놓으면 그들이 원하는 만큼만 사랑하는 척해도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그들은 “이웃”을 그들의 동족이나 가족과 친척이나 친지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종교 즉 유대교를 신봉하는 이들로 국한시켰다. 그래야만 그들이 원하는 사람들만 선택하여 필요에 따라 형식적인 사랑을 베푸는 모양새를 가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에 정통했던 그들이 “곡식을 거둘 때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이삭도 줍지 말며, 포도원의 열매를 딸 때도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하여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땅에 떨어진 열매를 다 줍지 말고 남겨두라.”(레 19:9-10)는 하나님의 명령을 몰랐을 리 없다.


 “너희는 너희 땅에 사는 외국인을 학대하지 말고, 그들을 동족같이 여기며 너희 자신처럼 사랑하라.”(레 19:33-34)는 말씀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가난한 자, 외로운 타향 사람, 쓸쓸한 나그네들을 그들의 “이웃”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 이웃의 범위를 넓게 잡아 현실적인 손해를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그들의 뜻에 맞도록 바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모세의 율법에는 있지도 않은 “네 원수를 미워하라.”를 추가한다. 그들의 오만과 위선이 어느 정도였나를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처사였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모세의 율법이 정의하는 “이웃”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그들과 함께 사는 외국인이나 나그네들까지 동족처럼 취급하라는 것이 모세의 율법이었기 때문이다.(레 19:34) 예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25-37)에서 들려주시는 “이웃”은 동족이 아니고, 종교가 다르며, 친구나 친지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전에 수록된 “이웃”에는 원수까지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로만 이웃의 범위를 축소시켰을 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는 명시되지도 않은 “네 원수를 미워하라.”를 마음대로 추가시킨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하나님은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돌보고, 사랑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릴 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를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어다.”(출 23:4-5)가 이를 말해 준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 25:21)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백하고 직선적인 명령이시다. 따라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유대의 랍비들이 그들 마음대로 각색하고 연출한 각본인 것이다. 


 이런 그들의 완악함과 위선을 잘 알고계시는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원수일까? 우리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모함하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방해가 되는 이들이 우리의 원수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가 우리의 원수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끌려는 사탄의 세력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진짜 원수는 사탄이다.(마 13:38-39; 벹전 5:8) 그러기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탄의 사주를 받는 자들이 회개하고, 주님의 품에 안겨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고 핍박하는 이들에게 보복하는 대신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믿는 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고 고상한 사랑의 경지다. 이 사랑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려면 그들 곁으로 다가 가야하고, 그들을 위해 간구하는 마음에 미움과 증오의 감정은 싹틀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엄숙한 명령을 받들려면 증오하고 경멸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믿는 자의 사명임을 일깨워 주시는 가르침이다. 후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를 비웃으며 조롱하는 무지한 무리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심으로 그들을 따르는 이들에게 원수를 위한 기도의 본을 보여주신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원수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겨누는 대신 기도할 수 있어야만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도, 불신자도, 회개한 이들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도, 인종과 민족에도 관계없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햇빛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은 세상 만민을 평등하게 사랑하신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아버지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를 좋아하고, 우리가 좋아할 수 있는 이들만 골라서 사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감싸고, 포용하며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신 것이다.


 세상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부모형제를 사랑하거나, 남녀 간에 진지하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며, 친지와 친척들 끼리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방인들이나 세리들도 하는 그런 사랑을 뛰어 넘을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저처럼 “고귀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믿기 힘들 정도로 “초특급” 사랑을 믿는 자들은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과 아들을 죽이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놀랍고 신기한 사랑이 그것이다.(롬 5:8)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들이 그런 사랑을 하려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고 예수님은 들려주신다. 이는 믿는 자들은 하나님처럼 “온전해야”한다는 뜻이 아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해와 비의 혜택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주시듯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관대함과 온유함으로 대하며, 그들을 포용하라는 뜻인 것이다. 


 이 말씀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성 어거스틴도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미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뺨을 때리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는 의문이다.”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의 신학자이며 목사인 알프레드 플러머(Alfred Plummer)는 말했다. “선을 악으로 갚은 것은 악마가 하는 일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지만,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라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사랑”을 실천 불가능한 목표로부터 끌어내려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함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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