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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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자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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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또 네 맹세한 것을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지니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지니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3-37)


“남자가 여자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창 2:24)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이란 제도다. 따라서 부부는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헤어질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감이 마땅하다. 


그러나 유대의 랍비들은 깨어져선 안 될 결혼의 언약을 무산시키는 “이혼 세칙”을 제정하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맹세”에 관해서도 그들은 관용을 보여 구약에 명시된 율법과 계명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변절시켰다. 그 과정과 경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맹세에 대한 관념이 어떠했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은 세상은 정의와 진리와 평화 위에 서야하며, 위선자와 거짓을 말하는 자, 남을 조롱하거나 모함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실을 중요시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삼마이 학파 랍비들은 결혼식 날 출중하지 못한 미모의 신부에게 “아름다운 여인”이란 찬사를 보내는 것조차 사실이 아니기에 옳지 못하다 했을 정도로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언약을 어기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자와 같다고 여겼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은 거짓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실을 중요하게 여긴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는 말이 진실임을 보장하거나 강조하기 위해 “맹세”란 형식을 사용하곤 했다. 


또한 그들은 서약이나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모세의 율법을 존중한 까닭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니 아니하리라.”(출 20:7)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레 19:1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트리지 말고 그가 그의 입으로 말한 대로 이행할 것이니라.”(민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신 23:21) 


모세의 율법은 이처럼 거짓 맹세를 하거나, 하나님께 서원하고 지키지 않으면 죄를 범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기에 유대인들은 맹세를 하고 지키지 못해도 율법을 범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하는 말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하는 맹세대로 행하지 못해도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기발한 방법을 그들은 원한 것이다. 


그들이 고심한 끝에 찾아낸 방도는 “꼭 지켜야 할 맹세”와 “안 지켜도 괜찮은 맹세”로 종류를 구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면서 한 맹세는 지켜야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한 맹세는 안 지켜도 무방하다는 논리로 거짓 맹세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편리한 방안을 강구해낸 것이다. 


위선의 대가 바리새인들의 이 같은 궤변을 예수님은 경멸하셨다. 예수님이 바리세인들의 표리부동한 언행을 얼마나 싫어 하셨는가는 다음과 같은 마태의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들이여, 너희는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하는 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금과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또 너희는 누구든지 제단을 두고 맹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그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두고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제물과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그러므로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성전과 거기에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요, 또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시는 분으로 맹세하는 것이니라.”(마 23:16-22)


산상수훈에 수록된 맹세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위선을 예리하게 지적하시며 그들을 꾸짖으신 내용과 같은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며, 땅은 하나님의 발판이요, 예루살렘은 위대한 왕의 도시며, 머리는 우리들이 그 한 터럭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과 머리를 두고 맹세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을 증인 삼아 하는 서약인 까닭에 지키지 않을 경우 거짓 맹세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하신 것은 “맹세”자체를 금한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않고도 빠져나갈 구실을 마련해 놓고 하는 맹세 따위는 아예 하지도 말라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맹세에 관한 예수님의 결론은 “회피성 맹세”는 하지 말 것이며, “긍정”과 “부정”으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서 그것이 진실임을 인정받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말이 참되고 진실된 것임을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맹세하는 형식을 취할 것이 아니라 언행이 일치하는 성실하고 진실한 삶을 통해 사람들이 그가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게 만들라는 것이 맹세에 관한 예수님의 결론인 것이다.


주후 2세기 희랍의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클레멘트는 기독교인은 사람들이 “당신 말이 진실이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라 묻지 않고도 믿을 수 있도록 신실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믿는 자들은 서약이나 맹세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의로운 삶을 통해 사람들의 믿음과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맹세를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주전 2세기로부터 주후 2세기 까지 400여 년 간 존속했던 고대 유대의 에세네 파 사람들은 어떤 맹세도 하지 않았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금욕주의자이며 신비주의자들이었던 그들은 맹세를 위중보다도 나쁘게 여겼다고 한다. 충절을 지키며, 평화를 사랑한 그들은 그들이 하는 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맹세하는 사람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주후 1650년 영국의 죠지 폭스가 제창한 명상운동으로 시작된 퀘이커교 교인들도 맹세하기를 거부했고, 그들은 오늘 날에도 맹세는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몇 차례 맹세한 기록이 있다.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후 1:20)와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갈 1:20)라가 그것들이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불법으로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받으실 때 대제사장이 “내가 너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느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하자 “네가 말하였느니라.”(마 26:64) 하셨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건대 예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하신 것은 맹세에 대한 “전면 금지령” 아닌 맹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을 통해 나타나는 인격과 인품을 통해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신뢰를 얻는 것이라는 말씀이라 믿어진다. 


아울러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권세로 나라를 통치하는 정부(롬 13:1)의 요구가 있으면 법정이나 청문회에 나가 선서하고 증언하는 것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맹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 얻은 사람이라면 사실과 진실만을 말하며, 또 말한대로 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믿는 자들에게 서약이나 맹세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없을 테니까. 


 또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그것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된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펼쳐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확장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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