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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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산상수훈: 복 있는 사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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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산상수훈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 여덟 가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가난”하면 행복해진다고 믿고 의도적으로 가난해지려 노력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 같다. 가진 것은 없더라도 주어진 처지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현명하며, 그렇게 사는 이들이 행복할 수는 있어도 “가난” 자체가 행복의 조건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기 보다는 몸도 마음도 부유하게 살기를 원한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심령이 가난”해야만 천국시민이 되는 복을 받겠다고 하셨으니 그들은 당황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도 “마음이 가난해야 행복할 수 있다.”말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어느 민족보다 가난의 슬픔과 고통을 뼈저리게 체험한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부끄럽고 추한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이다. 선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영적으로 파산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진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이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의 회개를 하고 예수님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심령을 지닌 사람은 그의 죄악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끼고 회개할 뿐 아니라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거룩하고 높은 곳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들을 돌보시고 그들의 영을 소생시키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사 57:15, 66:2). 예수께서도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가 오셨음을 밝히신 바 있다(눅 4:1`8). 


 그렇다. 심히 미약할 뿐 아니라 부끄러운 죄인이기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그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며 아무런 소망도 없음을 깨닫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명령에 다소곳이 순종하다 천국 문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는 목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 있는 사람의 두 번째 조건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는 안톤 슈낙의 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배고파 울어대는 어린 아이들이나 부모를 잃고 흐느끼는 철모르는 남매 또는 병상에 누운 야윈 소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생각만 해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른들의 경우에도 눈물은 기쁨보다는 슬픔의 소산물이며, 패배와 낙망과 좌절의 표현일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우리는 눈물 흘리는 대신 웃으며 살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째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고난이나 역경 혹은 슬프고 괴로운 일을 당해 우는 사람들을 가리키심이 아니라 참된 기독교인의 눈물을 흘리는 자를 의미한다. 믿는 자는 죄악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욕이나 명예욕은 끊어버려야 하지만 무거운 죄 짐을 지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시험과 고통과 근심의 거센 세상풍파와 싸우는 이들과 함께 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런 눈물을 흘려주셨다. 죽은 나사로를 위해 우셨고(요 11:35), 지은 죄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감람산 위에서 바라보시며 비통한 눈물을 흘리셨다(눅 19:41).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며 숱한 눈물을 흘렸다(행 20:17-24).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며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자도 복 있는 사람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설교의 주제가 “회개”였다. 자기 죄를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은 진정한 회개에 이룰 수 없다. 그러기에 그가 범한 죄 때문에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품 안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복된 자가 되는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6)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세 번째 행복의 요건이다. 세상은 유순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뚜렷한 주관도 없고, 강한 의지력이나 추진력도 없다고 여겨지는 그들에게서 취할 바가 없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해야만 충성된 십자군의 정병이 되어 그를 따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까닭은 “온유함”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힘없고, 무기력하고, 무능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누구보다 강하고 큰 힘을 가졌으나 마땅히 써야 할 때만 그 능력과 용기를 발휘한다. 다시 말해 온유한 자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힘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만 사용하는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단점이나 결점 혹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동시에 온유한 자는 자기보다 잘난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인정하며 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자기의 역량을 발휘하는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 마음이야말로 위대한 용기의 근원인 것이다. 


 어느 신부님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자기보다 잘 난 사람 인정해 주는 것”이라 한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도 온유한 사람의 용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민 12:3).자기 자신을 정복하지 못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못하면 남을 복종시킬 수 없고,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남을 다스릴 수 없는 법이다. 모세는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온유함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의 최대 민족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은 이 같은 온유한 마음을 지니고 그를 따라야 한다. 우리 앞에 서신 예수님이야 말로 “온유와 겸손”의(마 11;28) 화신이시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온유함”에 이어 인간을 복되게 하는 또 다른 요건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과 목마름이 얼마나 큰 인생의 문제인가를 모르고 살아간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엔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먹고 마시는 것처럼 절실한 문제는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루 세끼를 먹기 힘들었고, 아무 때나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기에 걱정 없이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그들의 갈망은 크기만 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며 실망을 안겨준 이 말씀은 그들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알려준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마 6:33)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믿는 자의 삶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임을 가르치심과 동시에 그 우선순위를 지키며 사는 이들에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육의 양식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그 해결 방안을 알려주신 것이다.


 “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관계는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만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깨달을 때 맺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로서의 품성과 인격을 가춘 사람이 되는 것이 “의”를 이루는 또 하나의 단계이다. 믿는 자가 이루어야 할 “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의”는 악으로 물든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까지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믿는 자의 삶을 살찌게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시 107:9)이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해져서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후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의”를 갈망함은 더욱 중요하다.

“의”를 추구해야만 우리를 배부르게 해주시겠다고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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