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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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함과 거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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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태동된 초대교회는 지극히 미약했다. 이 연약한 초대교회를 향한 세상의 억압과 탄압은 참으로 크면서도 가혹하고 잔인했다. 설상가상으로 외부세력만이 초대교회를 괴롭히며 박해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유대인들도 막 시작한 초대교회를 심히 억압하며 탄압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탄압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하며, 모든 종교의식을 철저하게 행해야만 구원에 이른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율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배척했으며, 그 선두에 바울이 서 있었다.

그 때문에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그를 배반자로 낙인찍고 그가 가는 곳마다 뒤쫓으며 괴롭히고 박해했으며, 여러 차례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맞서 싸우려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가르쳤다.

바울의 이 같은 가르침은 그의 자녀 된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달아야 한다. 고통과 핍박 속에서 신음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한 성경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라.”이기 때문이다.

“화평함”과 “거룩함”은 믿는 자의 기본적인 품성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고, 그를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맞아드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평화를 사랑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믿는 자들에게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유지함으로 어둡고 혼탁한 세상을 밝히며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함께 평화를 누려야 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우호적인 자세로 우리를 대하지만은 않는다. 우리와 그네들은 각기 다른 삶의 기준과 목표를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들은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아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고, 잔잔한 물가에서 물을 마시며 살 수 있는 축복된 사람들이다.
 물론 극심한 혼란과 역경과 시련이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인생의 풍랑이 일어나 우리가 탄 작은 배를 침몰의 위기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배 안에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우기만 하면 우리가 탄 배는 안전하게 건너편 해안에 도달할 수 있다. 예수님이 미친 듯 몰아치는 폭풍우를 잔잔케 해주시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는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 손으로 당장 움켜잡을 수 있는 것, 그들에게 현실적인 기쁨과 만족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을 원한다. 그런데 모두가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기에 정상적인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는 설정한 목표를 남들보다 먼저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사람들은 “지름길”을 찾게 된다. 어떤 이는 편법, 위법, 또는 불법이란 이름의 지름길을 택하기도 하고, 아예 원칙이나 법 같은 것은 무시하기도 한다. 진실로 둔갑시킨 거짓과 더럽고 가증스러운 본 모습을 위선으로 엮어진 옷 속에 숨기고 의롭고 거룩한 척 행세하는 파렴치한 사람들도 허다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당당하기만 하다. 그들 모두는 “내로남불”이라는 그들만의 원칙과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조국에선 이런 일을 행하는 무리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들에겐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것이냐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을 써야 상대를 제압하고 이길 수 있느냐는 것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상대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거나 불법을 합법이라 변경시키는 작업을 서슴없이 자행한다. 그러다 그 같은 행위가 밝혀지면 “아니면 말고”라며 슬그머니 빠져버린다.

상대편에 대해서만 그런 식의 부끄럽고 추하고 저질적인 일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편끼리도 자신의 입장이 불리해지거나, 처지가 위태로워지면 살아남기 위해 냉정하게 꼬리를 잘라낸다. 그러면 잘리는 꼬리는 혼자 죽을 수는 없다며 자르는 사람의 발꿈치를 잡고 늘어지는 추잡한 내부 분열상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셔서 원하는 역사를 이루시기는 분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사의 죄를 그들은 태연하게 범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국가의 체면과 위상을 손상시키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국내외의 동포들을 실망시키며, 분노하게 하는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근본 원인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화평과 거룩”과는 거리가 먼 자세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화평하게 살아가기를 기대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믿는 우리들이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화목하게 살아야 할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어둔 세상 밝히며 날로 부패해 가는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이 믿는 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사명인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형제자매 중에서도 이 귀중한 사명을 망각하고 세상에 동화되어 버리는 이들이 있음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최근에 무차별 총격사건들이 일어났고, 끔찍한 살인과 폭행사건들이 여러 차례 발생하기는 했지만 토론토는 아직 북미도시 중 가장 안전하고 평화스러운 도시 가운데 하나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에 모여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과 화평 가운데 선하고 정의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 스스로가 한 그릇의 음식 때문에 맏아들에게 주어지는 막중한 특권을 팔아버린 에서와 같은 불신앙의 길로 빠져들지 말고, 우리 믿음의 근원이며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이웃을 가볍게 여기거나 멸시하지 말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나 목표하는 바와 다른 이들을 비난하며 적대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들의 진정한 이웃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함을 유지하며 그들과 화평하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명령임을 잊지 말고, 그 명령을 받들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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