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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淸溪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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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명동을 뒤로하고 을지로를 지나 청계천(淸溪川)으로 향했다. 청계천은 1960년대 농촌 빈농들이 전국에서 대거 몰려 정착해 생계를 유지하던 곳이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어보아야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어 곤달걀이라도 팔아 살아가겠다고 몰려든 곳이 바로 이곳 청계천이다. 


 청계천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내부에 있는 지방하천으로, 한강 수계에 속하며 중랑천의 지류이다.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백운동 계곡이며, 남으로 흐르다가 청계광장 부근의 지하에서 삼청동천을 합치며 몸집을 키운다. 이곳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서울의 전통적인 도심지를 가로지르다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에서 중랑천으로 흘러든다.


 내 생에 청계천이 세 번 업사이드다운(upside down)이 됐다. 처음엔 ‘학고방’들이 청계천을 껴안고 다닥다닥 즐비하게 들어섰다. 그 후 인구팽창으로 복개를 하여 주민들이 성남으로 둥지를 옮겼고, 일부는 성북구 상계동, 하계동으로 철거를 당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이었을 때 복개를 철거하고 원상복귀 하여 역사적으로 굴곡이 심했던 곳이다. 


 처음 청계천을 찾았을 때는 조형물 같아 신선하지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여러 해가 지난 지금은 능수버들이 키를 넘고, 갈대숲이 우거지고, 갖가지 생물들이 서식하고, 원앙새 들이 유유히 노닐고, 팔뚝만한 잉어들이 자맥질을 하며 자연숲을 이루고 있다. 


 벽면에는 이조시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은 것을 원통히 여겨 그 영혼을 위로하러 수원으로 가는 대취타(大吹打) 행렬 그림이 웅장하면서도 이채롭다.


 공기도 산속보다 더 신선하여 산림욕을 즐기려면 시간을 낭비하며 멀리 갈 것이 아니라 이곳 청계천이 좋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굳이 욕심을 부려본다면 인공 물레방아도 몇 개 만들어 놨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아쉽다. 


 요즘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 모래바람에 미세먼지까지 겹친 불편을 생각하면 도시의 낙원이라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욱이 교통난에 시달리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니 신선이 따로 없다.

 

 

 청계천과 인왕산

 


 
만리길 휘휘 돌아 찾아온 청계냇가
물은 물이로되 옛 물이 아니라 서럽네
살여울 옥빛 색깔고운 물 언제 다시 볼까나

 

수표교 교각 아래 아낙들 방망이 소리
사대문 도성 인경 소리 알리는 듯 들리고
무심한 원앙새 한 쌍만 무심히 노니는데

 

 

 시조 한수를 읊고 종로5가 광장시장으로 들어서면 먹을거리 골목에 갖가지 술안주들이 주당들의 군침을 흘리게 한다. 그곳에 한국에 자주 나가다 들리던 사순댁 집이 있다. 사순댁은 4자매가 한곳에서 같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일순이, 이순이, 삼순이, 사순이. 이름이 기억이 안 돼 부르기 좋게 순서대로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중 사순댁이 젊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여성스런 면에 지성적이어서 이곳에서 일하기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일순댁은 남편이 월남에 파병됐다가 고엽제를 마시고 귀국 후 수전증이 재발해 평생고생을 하다 작년에 작고하고 홀로 살아가고 있다. 인생사 한번 왔다 가는 것 결코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알렉산드르 프시킨의 말을 위로랍시고 너스레를 떠니 내가 마치 tv문학관에 나오는 등장인물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광화문 광장

 

 


 낮술에 거나해 막내 사순씨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청계천을 거슬러 광화문 쪽으로 올라갔다. 우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묵념부터 했고, 어수선한 현실 분위기에 안정을 찾게 해달라는 작은 소망을 올렸다.


 촛불과 태극기 집회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촛농을 얼마나 많이 흘려놓았는지 시멘트 바닥이 미끈거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저쪽에서는 성조기가 기세등등하게 펄럭인다. 순간 ‘사대주의 종속국입니다?’라는 소리가 무의식중에 나왔다. 아뿔싸, 평소 잠재되어있던 소리가 취중에 나오고 말은 것이다. 


 하염없이 청와대 쪽을 응시했다. 주인을 잘못 만나서일까, 만감이 교차된다. 보이는 거라곤 인왕산 기슬 따라 먹구름 낀 운무뿐이다. 낙산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며 무학 대사로 하여금 도성 사대문을 쌓을 때 기초를 둔 곳이다. 오백년의 역시가 바뀌고 바뀌며 숫한 영웅호걸들이 죽어갔지만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게 무엇일까?

 

 

인왕산 낙산봉은 무학 대사 전설이
오백년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이 태조 임금 왕(王)자가 운무 속에 묻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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