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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22)
chungheesoo

 

(지난 호에 이어)

 

그리고 1968 년에 퀘벡 독립을 주장하는 퀘벡당 (Parti Quebecois : PQ) 이 탄생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해 6 월 25 일 Pierre E. Trudeau가 연방 수상이 되었다. 이 순간부터 두 명의 거인이 퀘벡 미래를 놓고 20년 동안 높은 수준의 격론을 벌렸다. Trudeau 수상은 1969 년에 이중언어 법을 통과 시켜 불어 및 영어가 캐나다의 공식 언어의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특히 공공기관의 의사소통은 주민들에게는 두 개의 언어로 민원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부여 되었고 그 후 캐나다의 지성인들은 두 개의 언어를 사용했다. 물론 이중 언어 사용이 서부로 갈수록 희박해지지만 결과적으로 불어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퀘벡인들은 원래 이중언어 민족이었기 때문에 본 제도의 수혜자는 영어권 캐나다 인이라고 불만도 했다.

 1969년에 Johnson 수상(보수당 Union Nationale)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Jean–Jacques Bertrand 이 수상이 되었으나 다음 해 총선에서 자유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그의 수상 생활은 1 년도 못 채웠다. Bertrand 수상은 그래도 법 63호의 언어 법을 통과시켜 학교에서 학부모들이 두 개 언어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를 부여했다.

한편 1970년 총선에서 PQ당도 후보자를 내세웠지만 7명의 극소수가 당선되었다. 총선 후 Levesque 는 이러한 말을 했다. “캐나다는 maison de fous, dans laquelle nous sommes ridicules, impuissants, diminues, reduits a brailler depuis un siecle et tragiquement ridiculises par les vieux partis qui nous prennent pour des imbeciles en nous fabriquant de ces maudits slogans comme Maitre chez nous, Il faut que ca change, Quebec d’abord et maintenant Quebec au travail …” (Lacoursiere, p.174)

(캐나다는 광적인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되었고, 무력하고, 천대 받고, 일 세기 동안 통곡을 하고 살았다. 더 슬픈 것은 우리가 주인이다, 변화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자, 퀘벡 만세…등의 슬로건을 외치면서 우리를 바보로 여긴 재래식 정당이 우리를 비참하게 조롱한다.)

주목할 것은 1960년대 붙어 ‘국가적’ 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다. 퀘벡 의회(Quebec Provincial Assembly) 대신 퀘벡 국회(Quebec National Assembly), Quebec Provincial Capital이 아니고 Quebec National Capital로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1970년에는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1970년 10월 5일 무장 독립주의 집단이 영국 외교관 James Richard Cross 를 납치하여 퀘벡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파격적인 선언문을 발표했다. “Faites vous-meme votre revolution dans vos cartiers, dans vos milieux de travail.” (Lacoursiere p. 175) (여러분, 여러분 동내에서 직장에서 여러분의 혁명을 하세요.)

며칠 후 그들은 건설부 장관, Pierre Laporte를 살해했다. Trudeau 수상은 군대를 개입시켜 Montreal 지역은 계엄령 상태에 빠졌다. 그 후 Trudeau 수상은 반역자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100여명의 체포로 일단 안정 되었다.

FLQ 사건 후 주요 노조는 주정부의 보수적 정책에 반발하여 좌쪽으로 변하여 CSN, FTQ, CEQ등의 노조는 1972 년 노사 재계약 협상 계기로 대대적 파업을 했다.

정부는 긴급 법을 통과시켜 직장으로의 복귀를 명했으나 노조는 이것을 무시했다. 노조 지도자들은 단기간 징역살이도 했다. 이 때부터 노조는 독립 운동의 날개가 되었다.

1973년 10월 29일 자유당의 Robert Bourassa 가 수상이 되었다. 퀘벡 독립에 대한 그의 입장은 이렇다. “Le separatisme doit etre rejete parce qu’il condamne le Quebec a des retards tragiques sur le plan de son developpement et parce qu’il expose les Quebecois, surtout les plus defavorises d’entre eux, a subir d’irremediables blessures economiques et sociales…Inacceptable dans ses consequences economiques et sociales pour les Quebecois, le separatisme assorti d’une union monetaire est en consequence parfaitement inutile pour le Quebec puisqu’il conduirait en pratique qu’a une souverainete fictive, illusoire et ephemere, une souverainete que les Quebecois auront tres cherement payee et qu’il n’est absolument pas necessaire.”

(독립은 거절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퀘벡 개발을 비참하게 지연시키고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특히 소외 층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경제적 사회적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캐나다와의 금융 통합이 수반되는 독립도 쓸데 없는 망상이고 이러한 조치는 현실성이 결여되고 환상적이고 헛된 것이다. 그리고 필요 없는 구상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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