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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17)
chungheesoo
2021-06-03
(지난 호에 이어)
Duplessis 에 대한 반발 운동은 1948년의 지성인들의 반발로 시작했다. 예술가 및 지성인이 공동으로 Refus global (총체적 반대) 라는 선언문을 발표 했다. “il regne de la peur multiformes et termine. Dans le fol espoir d’en effacer le souvenir, je les enumere: peur de soi -de son pere -de la pauvrete -peur de l’ordre etabli -peur de la ridicule justice -peur des relations neuves -peur de surrationel -peur de reussite -peur des ecluses grandes ouvertes sur la foi en homme -en societe future -peur de toutes les formes susceptibles de declencher un amour transformant -peur bleue -peur rouge -peur blanche : maillon de notre chaine” (Lacoursiere, p.159)
(수많은 공포에서 벗어났다. 추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이들 공포를 나열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 아버지에 대한 공포, 빈곤에 대한 공포, 새로운 관계에 대한 공포, 질서에 대한 공포, 형편없는 정의에 대한 공포, 비합리성에 대한 공포, 성공에 대한 공포, 사람을 믿는데 대한 공포, 미래사회에 대한 공포, 깊은 사랑에 대한 공포, 청 색깔 공포, 빨간 색깔 공포, 하얀 색깔 공포, 이것이 비참한 우리 처지의 고리다.)
이 글은 퀘벡인들이 쓸데 없는 공포에 시달려 바른 소리도 못하고 악순환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담은 글이다.
한편 지성인인 Pierre E. Trudeau (장차 연방정부 수상)와 Gerard Pelletier 는 Cite libre 라는 잡지에 다음의 글을 실었다.
“Le catholicisme y est, non pas propose, non pas enseigne, mais impose, inflige, assene. Dieu, cet etre tout amour dont on ne saurait a approcher que dans la liberte de son cœur, est injecte comme un serum. Meurs ou cois : voila ou nous en somme encore.’’ (Lacoursiere, p. 161-162)
(카톨릭 종교는 우리가 건의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르친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강제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신(God)은 우리 가슴속에 자유가 있을 때만 접근 할 수 있는데 우리에게 강제로 혈청 같이 주입 시켰다. 죽느냐 혹은 성장 하느냐가 우리의 과제다).
이 두 사람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캐나다 정치사에서 획기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본 글의 뜻은 카톨릭 종교는 퀘벡 주민에게 강제적으로 투입되어 참다운 믿음 생활을 어렵게 했다는데 있다.
신부들도 카톨릭 성당에 대한 비판에 합세했다. 필자의 스승인 Laval 대학교 교수인 Lois O’Neill 신부와 Gerard Dion 신부는 이와 같은 말을 했다. ‘‘Le deferlement de betise et l’immoralite dont le Quebec vient d’etre temoins ne peuvent laisser indifferent aucun catholique lucide. Jamais peut-etre ne s’est manifestee aussi clairement la crise religieuse qui existe chez nous. Jamais nous fut fournie une preuve aussi evidente du travail de dechristianisation qui s’opere dans la masse populaire’’ (Lacoursiere, p 164).
(퀘벡은 어리석음과 비도덕성을 지켜왔다. 정신차린 카톨릭 신자는 이것을 용납 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과 같은 종교위기를 체험하는 것은 처음이다. 지금과 같이 기독교 정신이 무너진다는 분명한 근거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이 두 분의 신부 지도하에 퀘벡 카톨릭 종교 개선 운동이 확산 되었으며 결국 1960년대에 와서 성당은 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1950년대의 퀘벡 지성인은 Duplessis 의 정치적 부패와 카톨릭 성당의 지나친 보수주의 그리고 정치 종교 간의 유착으로 인해 퀘벡 사회는 장치적 억압과 종교적 탄압에서 벗어나지 못해 교육의 비효율성, 경제의 미개발, 빈곤 악화, 빈부격차 심화, 사회의 후진성 계속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Duplessis는 1959년에 Schefferville 에서 사망했다. 그 후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퀘벡 사회를 현대화 시키느냐였다. 결국 이 문제는 퀘벡 독립문제로 연결 되었다. 이때부터 퀘벡 사회는 연방주의자와 독립주의자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개 집단의 공통점은 모두 퀘벡 국가주의자라는 것이다.
5.4 퀘벡독립운동의 본격화 및 체계화
제2차 대전 후 첫 번째로 등장한 독립운동은 1957년의 Raymond Barbeau가 창립한 l’Alliance Laurentienne 이었다. ‘‘L’Etat Laurentien sera une Republique unitaire, democratique, cooperative, communautaire et d’inspiration chretienne.’’ (Lacoursiere, p.167)
(Laurentien 공화국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통일적, 민주주의적, 단결적 및 대중적 나라다).
이 운동지지자는 별로 없었고 별 인기가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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