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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2)
chungheesoo

 

(지난 호에 이어)

1.2 모피 교역 및 불영전쟁

 Cartier가 떠난 후 50 년 동안 퀘벡은 프랑스와 연결이 단절 되었다가 1587 년에 Cartier 후손인 Jean 그리고 Michel Noel 형제가 와서 모피 상업에 종사했다. 마침내 프랑스 왕 Henri 4세는 신 프랑스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영토 개척을 지원하게 되었다.

1558년에 Troilus de la Roche de Mesgouez 경은 캐나다의 총 책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고 만다. 당시 신 영국 영토(New England)는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다.

프랑스는 1603 년에 Samuel Champlain 을 캐나다로 보내 그 동안 문제가 되었던 원주민 Iroquois 족을 진압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609년에 원주민, Iroquois 족과 평화를 맺어 퀘벡시를 중심으로 하여 모피 교역이 본격화 되었다.

1617년에 프랑스 이주민이 다수 도착했다. Paris 에서는 유명한 Richlieu 추기경이 실권자가 되어 신 프랑스 영토 문제를 직접 챙기기로 했다. Richelieu 추기경은 가장 강한 조치로 신 프랑스 공사(Compagnie de la Nouvelle France)를 설립하여 100명의 유명인사들이 주주가 되었다.

신 프랑스 공사의 중요한 사명은 4000 명의 프랑스 이주민을 이민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628 년에 400명의 이주민이 퀘벡에 도착했다.

 한편 1626년에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이 재발하여 영국 함대가 St-Laurence강을 타고 퀘벡시를 공격하려 했다.

Rimouski시 부근에서 4척의 프랑스 선박을 파괴시키고 영국의 사령관인 David Thomas 및 Lewis Kirke 는 Champlain에게 항복하라고 했으나 전쟁은 계속되어 퀘벡시는 3년 동안 포위되었다가 1629년에 영국군에게 넘기게 되었다.

 한편 신 프랑스인의 정착은 봉건주의식 토지 분활 제도로 시작했다. 우선 Robert Giffard 영지(Seigneurie)로 시작하여 많은 영지가 개발 되었다. 영지란 봉건주의 시대의 토지 부활제도와 유사한 제도로 정부가 영주에게 대규모의 토지를 하사하는 제도를 말한다.

영지는 보통 1 lieue (5,556 meters)의 정면(frontage) 그리고 1.5 lieue (8,334 meters)의 길이(length)의 토지였다. 영주는 소작인에게 이 토지를 분활 했다. 한편 영지는 주로 St-Laurence강변에 위치했다. Champlain은 퀘벡 성 및 몬트리얼 성 이외에도 Trois-Rivieres 성도 건립했다. 이와 같이 신 프랑스는 점진적으로 개척이 되고 이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1.3 종교 단체 유임 시작

17세기 초반 시기는 종교 단체의 유입 시기였다. 카톨릭 종교는 퀘벡 역사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종교 단체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프랑스의 교육제도와 의료서비스 제도의 도입 및 개발이라 하겠다. 1615년에는 les Recolletts 단체, 1625년에는 Jesuites, 1639 년에는 Ursuline 수녀 단체 등이 도착했다. Champlain은 1635 년에 사망했다. 즉 그는 1608년부터 1635년까지 27년 동안 퀘벡을 통치했다.

 

1.4 이로꾸와 원주민굴복, 모피 교영의 할성화, 프랑스인의 정착

1641년에는 Paul de Chambly de Maisonneuve가 도착하여 이주민 정착을 집중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리고 1653년에는 120명의 추가 프랑스인이 이민했다. 1650년대는 원주민 Iroquois와의 전쟁 시기였다. Iroquois 족은 모피 상업을 독점 하려고 사방을 공격하여 모피 교류 중심지로서의 Montreal은 위협을 받아 모피 재고가 바닥나기도 했다.

사태의 심각성 때문에 신 프랑스의 미래가 불투명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1660년에 Adam Dollar des Ormeaux 가 이끄는 상인들이 모피를 공급하여 프랑스 식민지는 보전 되었다.

1660년대에 와서는 신 프랑스 영토개발에 프랑스 왕이 직접 개입하여 신 프랑스는 일개의 정치적 경제적 통합된 단위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1663년에는 프랑스 왕 Louis 제 14세가 직접 나섰다.

프랑스 왕 Louis 14 세는 당시 강력한 수상 Jean Baptiste Colbert로 하여금 신 프랑스에 총독(Gouverneur) 제도를 도입하고, 총독 밑에 행정관(Intendant)을 두고 5명으로 구성된 독립적 위원회(Conseil souverain)를 두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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