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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고(7)-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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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황주는 최근의 전쟁으로 피해를 입어 고통 받는 도시로서 잊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 일본군은 중국군과 마주쳤지만 전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3만 명의 인구가 6000으로 줄었고 풍요롭던 도시가 파괴됐다.


집들이 불에 검게 그슬리고 부서진 지붕과 서까래가 무너져가는 집을 버티고 있었다. 더욱 슬픈 것은 일군이 야영을 위해 문과 창문을 모두 땔감으로 써 지붕 없는 흙담 만이 거리에 홀로 서 있었다.


이러한 파괴의 일부는 중국군에 의해, 일부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되었으나 대부분은 2만 명 이상의 주민이 피난 길에 자행한 것이다.


 황주 북쪽의 기름진 평야는 지역 주민들의 피난으로 경작되고 있지 않았다. 가축이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부지런한 소들은 만주로 향하는 피난 길에 짐을 싣고 모두 사라졌다.


날이 저물자 마부가 도적떼와 호랑이를 무서워하기에 어느 허름한 오두막에서 밤에 머물기로 했다. 평양의 겨울날씨는 참으로 좋았다. 모펫(S.A.Moffet) 목사(미 선교사, 평양 장로신학교 설립, 3.1운동을 세계에 알림)의 안내를 받아 도시를 구경했다. 날씨는 최상이었으나 광경은 최악이었다.


8만의 도시가 1만5천으로 줄었고, 가옥은 80%가 파괴되고, 대로와 골목은 무서운 폐허의 잔재로 덮여있었다. 평양은 군대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 실제로 시가전도 없었다. 도망간 중국군이나 점령한 일본군은 조선인을 친구처럼 대했다.


이런 폐허는 적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겠다고 공언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조선 훈련대). 왜인들이 조선인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 점차 알려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주민 대부분이 달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3주 동안, 상관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피난민이 남기고 간 재산을 도둑질했다. 모펫 목사도 700달러 상당의 물품을 도적 당했다.


그 이후의 점령 기간에 일 군대는 처신을 잘했고, 이웃과 상점에서 가져온 물건에 대해 정확하게 그 값을 지불했다. 주민들은 그들을 매우 미워함에도, 그들이 명령을 잘 지킨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그들이 후퇴하자 그들에 의해 무장되고 훈련된 조선인 훈련대로부터 고통 받을 것을 매우 우려했다


주민들이 걱정한대로 조선인 훈련대는 사람을 때리고, 강탈하고, 군관이 문관을 얕보기 시작했다.


1894년9월15일, 중국 봉천 사령관 좌보귀 장군은 평양 보통문(평양, 대동강 능라도 서쪽) 언덕에서 최후의 날을 맞이했는데, 5000명의 군사가 탈영과 사망으로 많이 줄어든 상태에서 평양 칠성문을 향해 내려오다 죽음을 맞이한 듯하다.


조선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부하 몇 명이 그 시신을 거두었으나, 도중 일군의 공격을 받아 시신이 없어졌다고 한다. 일본군은 그 자리에 비석을 세웠고, 비문 앞면에는 ‘봉천 사령관 좌보귀 장군 지묘’, 뒷면에는 ‘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함’이라고 새겨 놓았다. 장군이 죽고 많은 부상당한 군인들이 소나무 울창한 숲길을 따라 후퇴했을 것이다.


3주 후 모펫 목사가 평양으로 돌아왔을 때, 그 곳은 군인과 말의 시체가 뒤엉켜 쌓여 있었다 한다. 목사의 표현에 의하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공포였다”고 한다.


수많은 부상병들이 폐허가 된 가옥에 들어가 죽었는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살한 흔적이 보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검게 썩은 시체더미가 도처에 있고, 나의 눈에도 인간의 두개골과 갈비뼈와 골반이 붙어있는 등뼈, 팔, 다리, 모자, 벨트, 칼집 등을 볼 수 있었다.


 성벽 안 우뚝 솟은 산 위에는 일본군이 그들의 168명 사망자를 기념하는 비석을 멋지게 세웠다. 그들은 군신을 모시는 사당을 병원으로 바꾸어 부상자를 치료 했으며, 비록 많은 수가 부상으로 죽어갔지만 중국군 부상자도 돌보아 주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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