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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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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비숍 여사 

 

 

 

(지난 호에 이어)


 3. 청 군대의 출동


비숍여사가 봉천에 도착한 후, 조선은 정부군이 동학군에게 몇 차례 패배하자 왕은 주저 끝에 청에 도움을 청했다. 청은 신속히 응답했다. 청의 위여귀 장군이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아산에 도착했고, 일도 한양과 제물포를 점령했다. (후에 위여귀 장군은 평양 수비를 하다가 도주한 죄로 체포되어 처형된다.)


선전포고가 있은 후, 일이 바다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어 청군은 만주를 통해 파병되었다. 길림, 치치하얼 등에서 모집된 군인이 봉천을 통해 남으로 갔다. 그들은 훈련이 안된 유목민 출신으로 행군 도중 돈을 지불도 하지 않고 여관을 차지해 무엇이든 약탈했다. 


10명마다 비단 깃발을 들고 있었으나 제대로 무장된 사람은 드물어, 시대에 뒤진 구식 소총이나 긴 화승총을 갖고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단지 창을 들거나 막대기에 총검을 꽃아 들고 있었다.


이렇게 허술한 무장으로 무라다 소총(서양 소총을 개조해 일이 만든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대적한다는 것은 사실 자살행위였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군인들의 봉급은 일반 노동자의 월급보다 많았다. 이는 아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많은 청군이 죽자 군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식량과 마초가 준비되지 않았고, 배고픈 군인들은 순식간에 말과 수송 노새를 훔쳐가 잡아 먹었다. 군인들이 허가 받은 강도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그 가운데 훌륭한 장군이 있었는데 전사하였다. 일본군도 이를 알아 그가 적군이었음에도 추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좌보귀 장군은 5000명의 기병 여단장으로 기강이 잘 잡혀있어, 그를 존경하고 또한 두려워하였다.


전선 사태가 악화되자 도시에 있는 몸이 성한 거지와 실업자, 품팔이 인부를 모병하여 전투에 투입하였으나, 그들도 수송용 노새를 잡아먹고 하여 민간인들은 군인의 행패에 상점 문을 닿고, 산으로 피신하거나 했다.


민간인들은 일본의 점령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간절히 희망하기도 했다. 외국인으로 봉천에 더 이상 남아있는 것도 위험해 비숍 여사도 선전포고가 있은 후 20일 뒤에 봉천을 떠났다. 


4. 격전지 평양의 모습


 화창한 날씨가 평양으로 떠나는 나의 발길을 축복해 주었다. 첫 날의 여행은 작은 시골길, 좁은 계곡, 그리고 아름다운 계곡으로 계속 되었다. 마을의 규모는 작고, 인적은 드물었으며, 꿩이 너무 많아서 마부는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쫓아야 했으며, 물오리가 냇물에 가득했다.


길이 모두 잘 정돈된 것으로 미루어, 어느 고관이 지나가기로 되었던 것이 확실했다. 그 지방 주민들이 비가 내려서 생긴 구멍과 마차바퀴 자국을 메우고 있었다. 고관이 여행할 때면 지방의 모든 집에서는 남자 한 명이나 또는 대리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중 서흥을 지났는데(평양 동남 100킬로미터 지점), 500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길가 얕은 개울에는 둑을 따라 오물이 쌓여있는데, 어느 관리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 관리는 해악이 심해, 관청이 있는 마을은 차라리 관리가 없는 곳보다 더욱 쓸쓸해 보였다. 조선의 관리는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이다. 대부분 관리는 사교와 쾌락을 위해 한양에 살고 있으면서 그의 부하를 책임자로 그곳에 남겨놓는다.


재임기간도 짧아 그곳의 백성을 위하기보다 그들을 갈취하는데 더욱 관심이 있었다. 단조로운 시골길을 거쳐 우리는 황주에 도착했다(평양 남단 40킬로미터 지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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