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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3)-향신료를 둘러싼 인도네시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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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예전 제임스 쿡 선장이 태평양 여러 섬을 처음 방문하고 있을때, 범선에는 고기를 오래 보관할 방법으로 후추를 사용했다(그 외는 고기를 소금에다 절였다).


 후추는 톡 쏘는 맛에 방부효과가 있어 후추를 고기 속에 짓이겨 넣고 배 천정에 달아 놓곤 했다. 그래서 후추는 당시 항해 필수품으로 비싸게 거래됐다.


 그 외 여러 향신료가 서구 귀족들 식탁에 인기 품목이 되자, 이를 찾아나서는 해양인이 늘었는데, 다음 이야기는 이때 일이다.


 본론


 오늘날 인도네시아 보루네오 섬과 뉴기니 사이 몰루카 제도에는 여러 작은 섬들이 있는데, 17세기 초에 작은 섬들은 각각 작은 독립 왕국이었다.


 지금은 먼나라 이야기나, 몰루카 제도는 정향(카레의 향신료중 하나), 메이스, 육두구(사향 냄새나는 호두)등 값진 향료의 유일한 산지였다. 당시 메이스, 육두구는 인도네시아의 한 작은 섬(반다섬)에서만 자랐다.


 주민들은 귀한 향신료를 수출하고 대신 인도, 중국 등에서 유입되는 식량과 공산품을 얻었다. 이곳 주민이 유럽과 처음 접촉한 것은 16세기, 포르투갈 상인이 향신료를 사러 왔을 때였다. 그 전까지는 오스만 제국이 통제하고 있던 서아시아 무역로를 거쳐야만 살 수 있었다.


 1488년 포르투갈인이 희망봉을 발견하고, 1498년 처음으로 인도에 닿은 후 이들은 인도네시아 향료 산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곧바로 향료 무역을 독점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511년 몰루카 시장을 장악했는데 이곳은 말레이시아 서부의 항구도시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온 향신료의 집산지 였다. 여기에서 인도, 중국, 아랍 등지에서 온 상인들이 이를 사서 서방으로 실어 날랐다.


 동남아시아는 향신료 수출을 기반으로 나름의 경제 발전을 누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지역을 드나드는 서양인들이 늘기 시작했다. 그중 네덜란드인이 생산지와의 직거래로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자 주변의 여러 향료 생산지를 방문, 국왕을 설득해 독점권을 확보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군대를 갖춘 네덜란드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접근하는 타국 무역상을 쫓아냈다. 이들은 향신료 생산을 늘리기 위해 현지인을 더 많이 동원하더니, 드디어 가구마다 생산 할당량을 배당, 원주민들은 강제노역을 제공하는 꼴이 되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주위의 섬들을 모조리 장악, 수출을 독점하려 했으나 다양한 형태의 도시국가(사실상 작은 읍 정도) 형태인 이들을 모두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영국, 인도, 중국, 포르투갈 상인들이 섬을 찾아다니며 개별적으로 생산지와 직거래를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향료무역을 독점하겠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총독 쿤은 1628년 왕을 포함 주민을 모두 학살하고, 향료생산 노하우를 보존하는데 필요한 소수만 남겼다.


 그리고 네덜란드동인도회사 직원 68명을 농장주로 하여, 생존시킨 주민에게서 생산방법을 배우고, 외부에서 노예를 사들여, 텅빈 섬을 서구의 대농장 형태로 바꾸었다.


 17세기말 생산량을 반으로 줄이자 가격이 배로 뛰어 올랐다. 1만5천명의 무고한 인명을 학살한 탓에 인근 작은 섬 왕국은 네덜란드의 위협을 피하고자, 기타의 다른 수출 작물까지 모두 생산을 중단했다. 1620년 자바섬에서는 후추나무를 모두 잘라 버리고, 주민들이 내륙 깊숙이 옮겨갔다. 인구는 줄고, 도시는 몰락하는 재앙이었다.


 결론


 18세기말, 인근의 거의 모든 지역이 유럽 식민제국의 그늘에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이렇게 현대까지 네덜란드 식민지였다가, 2차 대전 중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한국과 같은 시기에 독립한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옛 영화를 그리했는지 다시 침공했으나 미국 등 여러 나라가 만류해 철수한다. 아직도 기회만 있다면 제국주의 만행이 발동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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