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한인문인협회 2021 신춘문예 단편소설,입선 '귀로'
budongsancanada

 

 김기수

 

약력

-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1999)

- 삼성전자 근무(~2014)

- 캐나다 이주(2015)

- 회사원 (현)

 

 

(입상소감)

마음 한 곳, 언제든 버릴 수 있게 꽁꽁 묶어 두었던 보따리 안에 신춘문예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두터운 먼지나 털어낸다고 별 기대 없이 응모한 것이 입선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꿈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의 놀랍고도 두근두근한 기분이었습니다.

비록 지금 제 글이 배밀이하다 막 일어선 아이의 걸음처럼 서툴고 어색하지만

조금씩 앞으로 꾹꾹 내디뎌 보려고 합니다. 기쁜 소식과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로

 

유진은 오늘도 이민성 홈페이지를 들어갔다 나와서는 한숨을 내쉰다.

“오늘도 아닌가봐”

한숨이 더해져서인지, 후덥지근해진 집안에 환기라도 시킬 겸 나는 창문을 열었다. 이미 제법 더워진 바깥 날씨에, 창을 열어도 덥기는 매한가지. 잠시 창밖을 보고 있던 내게 유진이 물었다.

“당신은 영주권이 나오면 뭐가 제일 하고 싶어?”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한국으로 가고 싶어. 아무것도 없이 돌아가고 싶진 않아. 최소한 영주권이라도 있으면 돌아가도 할 말은 있잖아. 괜히 영주권 못 받아서 돌아왔다는 자존심 상하는 이야길 들을 필요도 없고”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럼 영주권 받고 다른 나라로 갈까? 거기 가서 또 영주권 받는 거지? 뭐랄까, 취미처럼 영주권을 모으는 거지?”

“하하하, 그럴까?”

그녀의 웃음소리는 내가 목구멍까지 꺼냈던 대답을 도로 밀어 넣어버렸다.

- 신춘문예에 응모해보고 싶어.

나는 언젠가 영주권이 나오면 이곳에서도 해마다 열리는 신춘문예에 응모해 보고 싶었다. 여기라면, 그나마 잡아 먹히지 않고 헤엄칠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물이라 생각했다. 큰 물에서는 수영은커녕 발조차 담가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예전부터 가수 유재하를 존경했다. 아름다운 시를 썼다 싶었는데 거기에 음악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연주하고 편곡, 노래까지 하여 영원히 살아 움직이게 했으니.  

요절마저도 완벽해 보이는 이 천재 창작자를 동경해 나도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것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단지 나에게 그것은 음악이 아닌 문학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뿐이었다. 차마 고백 편지를 건네지 못했던 어린 시절처럼 용기도 자신도 없었다.

거기다가 지금은 영주권도 없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용기를 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 고백도 못해보고 보내버린 첫사랑처럼 후회하진 않을 것 같았다.

예전에 유진에게 소설을 쓰는 것, 신춘문예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나 소설을 써볼까?”

“돈 안 돼. 순수문학? 고리타분해. 신춘문예? 끼리끼리 지들 잘난 맛에 어려운 말이나 해대려 하고 유식한 척이나 하려 하지. 그런 게 되게 고상한 건 줄 알고. 요즘 애들 그런 거 안 좋아해. 하려면 웹 소설을 써. 가볍고 통통 튀는. 그게 돈이 된다니까. 잘 나가면 드라마도 되고. 근데 당신 글은 통통 튀지도 않고 상상력도 부족한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유진에게 신춘문예 따위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돈 안돼, 라는 말을 이길 수 있는 건 마땅치 않다. 그리고 맞는 말이다. 시대는 변했으니까. 유튜브가 대세가 될 줄 알았던가.

속으로 삼켜버렸던 그 말은 그녀가 떠나버린 어느 가을날, 다른 모습으로 날 찾아왔다.

“여기서 사는 건 지긋지긋해. 긴 겨울, 눈은 또 왜 그렇게 많이 와? 갈 데도 별로 없고. 병원도 거지같고. 팁 주는 것도 싫어” 타향살이의 외로움, 고국에 대한 향수로 지칠 대로 지쳐있던 유진은 쌀포대에 생긴 벌레를 잡아내기라도 하는 듯 고단했던 나날을 끄집어낸다.

팁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했다. 팁은 서비스에 대한 것이지 음식값에 대한 것이 아닌데, 왜 비싼 음식을 시키면 같은 서비스에도 음식값의 몇 퍼센트 식으로 더 많은 팁을 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팁을 당연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었다.

한번은 한 음식점에서 팁을 주고 가지 않은 손님들 뒤에다 대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주인을 본 적이 있었다. 나도 팁을 안 준 적이 몇 번 있던 가게라서 그 이후로는 그곳에 다시 가지 않았다.

“그러면 같이 정리하고 들어가자”

“아냐 내가 먼저 들어가서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을게. 당신은 여기 정리하고 천천히 들어와. 둘 다 실업자로 있을 순 없잖아”

그녀의 똑 부러지는 대답을 반대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내 마음의 포대 속에도 벌레가 스멀스멀 거리고 있었으니.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왜 이렇게 쿨해? 뭐 생각해 둔 거라도 있는 거야? 자기답지 않아”

그녀는 나의 빠른 결정이 맘에 드는 표정이었다.

천천히 생각해봐도, 오도가도 못하는 절벽 앞에 서있던 이방인처럼 서러움에 몇 번이나 눈물을 펑펑 쏟았던 유진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렇게 하자” 였다. 그러니까, 그게 최선이었다.

그날 우리는 스시를 테이크아웃해 와서 화이트 와인과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섹스를 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날의 최선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여름, 지루했던 프로세스 끝에 영주권 승인이 났다. 영주권 받기까지의 이야기를 해보라 하면, 할 말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그 이야기를 글로 써낸다면 매년 수만 편의 흥미진진한 단편소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아무튼, 나 역시 다사다난했던 과정을 거쳤고, 승인이 난 후에도, 이러저러한 처리 과정 등이 더해져, 단풍이 들기 시작하던 가을이 되고서야 영주권 카드가 집으로 전달되었다.

나는 한참을 영주권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범죄자처럼 나온 사진은 영 맘에 안 들었지만. 그리고 유진은 이야기한 대로, 영주권 카드가 나오자마자 한국행 비행기를 구매했다.

 

“바로 가. 괜히 주차비 내지 말고”

공항에 가는 길에 그녀는 예의 똑 부러지는 말을 한다. 나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하자 나는 차를 입구에 정차해 놓고 말없이 짐을 트렁크에서 꺼내 카트 위에 실었다. 그런 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살짝 안겼다가 이내 카트를 끌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시큐리티가 다가와서 차를 빼라고 할 때까지 끝내 뒤돌아보지 않는 그녀를 보며 입구에서 서성이다가 차를 몰고 집 쪽으로 향했다.

월차까지 냈는데 고작 지금 시각 오전 10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무엇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습관적으로 차를 한인 마트로 몰았다. 여기에 살면서 제일 자주 갔던 곳이다. 맥주와 안줏거리, 저녁에 바로 먹을만한 즉석식품 몇 가지를 사고 무가지 신문들을 챙겨 집으로 왔다.

점심은 낮술이다. 출출해지자 아까 사 온 캔맥주를 땄다. 안줏거리로 사온 조각 치킨을 전자레인지에 데운 후 가져온 신문을 펼쳤다. 따분한 이곳 뉴스와 이미 인터넷으로 봤던 한국 뉴스. 한국에서 토요일 저녁에 방송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이곳에서는 토요일 낮에 볼 수 있는 시대에, 한국은 그렇게 먼 곳이 아님에도 누군가 한국에 간다고 하면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사람이 인지하는 물리적 공간감은 제아무리 최첨단 기술이라 해도 줄여줄 수는 없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읽을만한 기사를 찾으며 신문 페이지마다 치킨 기름을 묻혀가며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발견한 한 박스광고에 나도 모르게 맥주가 아닌 손톱이 입으로 갔다.

‘신춘문예 공모’

손톱 끝을 살짝 물어뜯고 나서야 다시 정신이 돌아온 나는 가슴이 두근댐을 느꼈다. 마치 고백편지를 손에 들고 있는 내게 상대가 다가 오고 있는 순간처럼, 이제 건네 주기만 하면 되는 그 순간처럼. 한동안 잊고 살고 있었다. 어차피 자격도 안된다며, 속으로 삼켜 망망대해 같은 망각의 바다로 흘려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광고를 오려, 혼자 눕는 게 낯선 침대에 누워 한참을 보았다.

- 단편소설 200자 원고지 70매 내외. 11월 20일까지.

원고지라니. 요즘은 그런걸 어디서 살 수 있으려나? 원고지를 예전 80년대 말 90년대 초 학창시절에 써본 적이 있으나, 그 이후로는 글자가 세로로 쓰여 있고 오른쪽으로 책장을 넘기는 옛날 책처럼 본적 없고, 다시 찾을 필요도 없이 살아왔다. 그 시절, 글짓기가 최소 다섯 장이었는데, 그것도 얼마나 먼 길이었던지.

200자 원고지 70매. 몇 자를 써야 하는 거지? 200 곱하기 70은 14,000자. 워드로 치면 글자 수가 자동 계산(띄어쓰기 포함)되니 침 묻혀가며 원고지 수를 셀 필요 없어 편하다.

11월 20일. 채 두 달도 남지 않았지만 충분한 시간이다. 다시 쓰든 고쳐 쓰든.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귀한 물건을 우연히 찾아낸 듯한 들뜬 마음이 고리타분하다는 그 일을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주저하는 마음과 마치 격정적으로 몸이라도 섞듯이 나를 침대에서 밤새 뒤척이게 했다.

 

“오퍼가 없네요”

마땅한 바이어가 나타나지 않아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을 한다. 그러나, 표정은 묘하게 밝았다.

제니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신문 광고에서였다. 유진을 공항으로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한인 마트에서 집어온 신문들. 거기서 오려낸 그 신춘문예 공모 페이지 뒷면에 그녀가 있었다. 나는 살던 집을 정리하기 위해 마침 리얼터를 구하려 하고 있었고, 그때 그녀는 바로 여기 있잖아요, 라고 하는 듯,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저, 집을 팔려고 하는데요”

“아 네, 그럼 한 6시쯤에 댁에서 뵐 수 있을까요?”

전화를 끊고 나서, 유진이 머물렀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듯, 집을 정성스레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불보와 베갯잇을 다 새로 갈아 입히고 벗어놓고 간 빨래와 같이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그리고 구석구석 유진의 물품들을 쓰레기봉투에 쓸어 넣었다. 어차피 이삿짐에 넣지 않을 것들이었다. 그날 저녁 그녀가 집으로 찾아왔다.

저녁이 되자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한동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광고 속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얼굴은 처음보다 더 상기되어 있었다.

“저를 어떻게 알고 연락하신 거죠?” 테이블에 앉은 그녀는 서류뭉치들을 꺼내면서 물었다.

“신춘문예, 아니 신문을 보고. 머리 스타일이 사진과 다르시네요”

광고사진보다 더 긴 머리를 하고 있던 제니는 간단한 본인 소개 후 계약 절차와 옵션 등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계약서 사인을 요청했다.

“집을 둘러봐도 될까요?” 여러 장에 사인을 끝낸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니는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집이 깨끗하네요. 손볼 데는 없는 거 같아요”

집수리 이력에 대해서 몇 가지 더 물어보고서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제니가 말했다.

“서류는 스캔해서 메일로 보내드리고, 복사본은 다음에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휴, 다 된 것 같네요”

“혹시, 예전에 인천에 사셨나요?” 서류뭉치들을 다시 주섬주섬 챙기고 나서 내 얼굴을 살짝 보더니 제니가 묻는다.

“아뇨. 회 먹으러 월미도에 가 본 적은 있어요. 아, 짜장면 먹으러 차이나타운도 가봤네”

“전에 알던 사람하고 닮으셨어요. 많이” 그녀가 예의 그 미소를 짓는다.

그날 이후, 팸플릿을 가져오거나 리스팅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점검하거나 하면서 제니와 나는 자연스럽게 연락과 만남을 가졌다. 물론, 지극히 사무적인 것들이었다.

며칠 후, 나는 장을 보기 위해 한인 마트를 들렀다가 정육 코너에서 우연히 그녀를 발견했다. 서로 모르던 시절에도 이곳에서 몇 번쯤 마주쳤을까? 알고와 모르고의 차이는 알고와 모르고의 차이보다 크다. 알고 나서야 소우주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나중에 커질지 사라질지 모르지만.

“스테이크를 해 드시려나 보다”

조용히 옆으로 다가가 같이 고기를 고르는 척하면서 말을 건넸다.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어머, 여기서 뵙네요. 장 보러 오셨나봐요”

“네 퇴근길에. 혼자 오셨나봐요?”

“네. 저도 퇴근길에. 그럼”

서로 가볍고 묵례로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나는 장을 보고 마트 내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순두부찌개를 시켜서 테이블로 가져와 앉았다. 반쯤 먹었을까? 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느꼈다.

“여기 앉아도 돼요?” 고개를 올려다보니 제니였다. 그녀도 순두부찌개를 담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약간 놀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보았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다.

“집에서 스테이크 안 해 드시고요?” 나는 물로 입을 헹구고 나서 물었다.

“배고파서요. 집에 가서 해 먹으면 늦고. 스테이크는 안 샀어요” 제니는 숟가락으로 밥을 퍼 올린다.

“가족들은요?”

그녀는 입에 있던 것들을 천천히 다 삼키고 나서도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혼자 살아요.”

“아. ” 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뭔가 말하기 껄끄러운 사연이 있을 듯했다.

“근데, 무슨 일 하세요?” 화제를 돌리면서 제니가 물었다.

“조그만 회사에 다닙니다. 저 쪽 두 블록 아래 사거리에 있는”

“아 거기 알아요. 회사 말고 동네요. 하는 일이 그런 거라. 남는 시간에는 주로 뭐 하세요?”

“그냥 이것저것. 주로 소비적인 것들 위주로요.”

그녀는 소비적인 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글쓰기를 좋아해요. 한때였지만 문학도였죠”

“아, 그래요? 사실 저도 그런데”

“문학을 전공하셨다고요?”

“아뇨,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고요. 신춘문예에도 한 번, 재미로 지원해보고 싶고” 나는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재미’를 강조해서 말했다.

“그래요?” 제니는 환한 미소로 호감을 보이며 상체를 내 쪽으로 가까이했다. 나 역시 같은 관심사의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고리타분해 보이죠? 그런 거? 라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눈썹을 치켜 눈을 똥그랗게 떴다. 그렇지 않다, 라는 뜻이리라.

“습작 쓰신 거 있어요?”

“단편 소설 몇 편”

“아주 소비적인 일만 하시는 건 아니네요”

너무 읽어 보고 싶다며 혹시 그 습작을 보여줄 수 있냐는 부탁에 그날 저녁, 메일로 제일 괜찮다고 생각한 습작 한 편을 제니에게 보냈다. 부끄럽지만… 이란 말을 덧붙여서.

 

다음 날, 점심시간 직전에 전화가 왔다. 제니였다.

“지금 회사 근처인데 점심 전이시면 같이 식사하실래요? 제가 도시락을 사 왔는데요. 근처 공원에 있어요. 마침 날씨도 좋고”

공원에는 그녀 말대로, 맑고 따뜻한 날씨에 잔치를 시작하려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듯한 나무들 아래로 산책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꽃무늬가 있는 감색 원피스에 연한 황토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자줏빛 스카프를 두른 제니는 나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 같은 투명한 가을빛에 어울리는 그녀의 세련된 모습은 무겁게 찌푸린 겨울철에나 어울릴 듯한 무채색의 후줄근한 점퍼와 티셔츠, 빛바랜 청바지에 낡은 운동화를 신은 내 모습과는 너무 대조되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어제 보내주신 소설에 대한 답례예요. 스시 좋아하세요?”

허벅지쯤에 어제 순두부찌개를 먹다가 흘린 자국을 발견해내고는 얼른 손으로 가리며 벤치에 앉았다.

제니의 뒤쪽으로 빨갛게 물든 단풍 나뭇잎들이 살짝 부는 바람에, 그녀에게 박수갈채라도 보내는 양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제 소설 너무 재밌게 봤어요. 어쩜 글을 잘 쓰세요. 그러니까, 그 둘이 다시 만나나요?”

“아 그건, 독자의 상상이죠”

“불쌍해요. 그 여자. 많이 외로웠을 거야” 잠시 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대뜸 뭔가가 생각난 듯 달뜬 표정으로 말했다.

“신춘문예에 지원해봐요”

“네? 아휴 그 정도는 아니고요. 기본도 안 되어 있고. 문학도 잘 모르고”

“그런 게 중요한가요? 재밌으면 되는 거지. 저도 글을 다시 써보고 싶네요.”

“재밌게 봤다는 말보다 그 말이 더 듣기 좋은데요?” 창작의 또 다른 즐거움은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리라. 유재하가 내게 그랬듯이.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며 점심을 먹었다. 그녀는 나의 소설에 몇 가지 에피소드를 더 추가하면 좋겠고, 심리묘사가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조언해 주었다. 내가 유재하에 대한 나의 존경심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는, 자기도 유재하를 좋아한다며 맞장구 쳐주었다.

“소화도 시킬 겸, 좀 걸을까요?” 나의 제안에 점심을 다 먹은 우리는 천천히 산책에 나섰다.

“혹시 여기서 계속 사실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제니가 물었다.

“미련은 남지만…… 모르죠. 맘이 바뀔지도”

그랬다. 한국에 다시 돌아간다 해도 딱히 뭐하나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 차라리 지금 여기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나가주세요 라고 하지 않을 영주권도 있고, 크진 않아도 집도 있고, 변변치는 않아도 직업도 있으니. 돌아간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주위에 없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괜찮은 매물이 있는데 한 번 보실래요?” 나를 향해 돌아서던 그녀의 어깨가 나에게 살짝 닿았고 그 때 코끝을 스친 샴푸 냄새. 아, 두근거렸던 그 옛날 어느 순간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어지러움을 느꼈던 나는 망설일 틈도 없이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말았다.

 

과연 그녀 말대로였다. 위치는 좀 더 외곽이었지만 가격은 적당했고 무엇보다도 거실의 큰 창 가득히 들어오는 깊어가는 가을 풍경에 감탄이 나왔다.

“여기가 지대가 높아서 저기 컨저베이션 에어리어가 다 내려다보여요. 저기에 작은 시내도 있어서 산책하기도 좋고. 겨울에 눈 오고, 여름에 비라도 오면 너무 운치 있을 거 같아요”

작은 책상을 놓고 창밖을 보면서 한가로이 글이나 쓰면 참 좋겠네,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창밖을 보면서 글을 쓰면 좋을 거 같죠?” 제니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야기했다. 밝은 창을 등진 제니의 모습이 풍경화처럼 그대로 멈춰 내 안으로 들어옴을 느꼈다.

“이 집에서 살고 싶네요”

집을 나오면서 나의 반응을 살피던 제니는 나의 말에 자신감이 생긴 듯 주말에 몇 군데 더 보러 가자고 했다.

 

그날 저녁, 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은 어떻게 돼가?”

“몇 명이 보고 갔는데 반응은 별로 없네. 근데 여기서 괜찮은 집을 봤는데, 그리로 이사 갈까?”

“미쳤어? 난 다시 거기 가고 싶지 않아. 살고 싶음 혼자 살아”

전화를 끊고 나는 이곳에 혼자 남는 상상을 해본다. 그림 같은 풍경을 품은 집에서 글을 쓰며, 산책하며 여유롭게 살 수 있으려나. 유진은 가끔 찾아오려나. 제니는? 부쩍 그녀가 떠오른다. 제니와 그 집에서 산다면? 내가 왜 이러지. 안되는 걸 알면서도 꿀단지에 자꾸 손가락을 넣는 아이처럼. 외로워서 그런 거라며 스스로를 용서하며 잠을 청했다. 갈 곳을 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듯, 조금 뒤척였던 것도 같다.

 

주말에 제니와 집을 보러 다녔다. 그녀도 나도 그렇게 집을 보러 다닐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집을 팔고 이곳을 떠나려는 나에게 그녀는 열심히 집을 설명하고 보여주었다. 내 마음이 바뀌어 여기서 집을 다시 사길 바라는 것일까? 비즈니스차원에서? 아님, 내가 정말 여기서 계속 살기를 바라는 것일까? 사적인 마음으로?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몇 군데를 따라다녔다.

“저녁 식사하시고 가세요”

다시 집까지 데려다 준 제니에게 저녁 식사를 권유했다. 마침 저녁 시간이 거의 다 되었고, 주말에 혼자서 저녁을 먹는 것도 싫증이 났던 차였다. 제니는 사양했으나 나의 거듭된 요청에 마지못한 척 집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자주 오니 마치 우리 집 같네요. 이 집 숟가락 개수도 알아요”

제니는 그동안 사진을 찍으러, 팸플릿 등을 갖다 주러, 그리고 구경하고 싶다고 연락 온 손님들을 몇 차례 데려오면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 없는 우리 집을 꽤 드나들었었다. 심지어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졌다며 한 번에 정확한 위치의 캐비넷을 열어 휴지를 꺼내 갈아 끼울 정도였다.

“정말이요?”

“이 집 젓가락 개수 나누기 이” 제니는 깔깔거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그런 그녀를 보는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금방 할 수 있는 게… 스파게티 어떠세요?” 냉장고 안에서 간 소고기를 발견하고는 내가 물었다.

“베리 굿” 제니가 생글거린다.

뚝딱, 스파게티를 준비하고 맥주를 두 캔 냉장고에서 꺼내 식탁 위에 하나씩 놓았다.

“자 기다리시느라 갈증 나실 테니, 맥주부터 한잔!”

“음, 맛있어요. 글도 잘 쓰시고 요리도 잘하시네요. 만점 만점에 만점 드릴게요”

“삼만점 받은 기분이네요”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고 그녀도 따라 웃었다.

“이곳에는 언제 오셨어요?” 스파케티를 포크로 돌돌 말아가며 제니가 물었다.

“저는 사년 전에 왔습니다. 한국에서 조그만 회사에 다니다가 야근과 휴일 근무에 지쳐서 때려치우고 왔습니다. 여기오면 더 좋을 줄 알았는데 와서 이래저래 고생만 했네요. 와이프는 몸도 마음도 지쳐서 먼저 들어갔고요”

말끝에 갑자기 우루루 몰려든 씁쓸한 기분에 맥주를 벌컥 마시고는 나는 물었다.

“제니씨는요?”

그녀는 인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녔고 그때 첫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동창이었던 그와 모든 게 잘 맞았고 서로 사랑했으며 같은 대학교에까지 진학해 변치 않는 만남을 이어갔었다. 그녀는 영문학과에 진학했다고 했다. 그런데 대학교 1학년 겨울에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그에게 교통사고가 나고 말았다. 택시를 타고 가다 반대편에서 오는 음주운전 차량과 정면충돌해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녀도 모임에 같이 갔었으나 그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중간에 먼저 나왔다. 중간에 가는 것이 미안했는지 그는 말없이 조용히 사라져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었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한동안 집에서만 지내다가 결국에는 자퇴를 했다. 그리고는 여름이 오기 전 이곳으로 유학을 왔다고 했다. 유학 시절 만난 한국인 교포와 졸업 후에 결혼해서 영주권을 받아 이곳에 자리를 잡았으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끝내 이혼했다.

“제가 괜한 걸 여쭤봐서…”

처음의 밝았던 모습이 사라진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새로 와인을 가져와 따라주었다.

“저는 제 첫사랑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고 나서는 그 이후 누구를 좋아해도 with all my heart란 말을 쓰지 않았어요. 그 사람의 자리는 항상 비워 놨거든요. 그게 그 사람에 대한 도리인 것도 같고. 하지만, 이미 오래된 이야기라 이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그냥 비어 있을 뿐”

멍한 표정의 제니는 와인잔을 비워냈고 나는 그녀의 상처를 위로하듯 그 빈 잔을 채워주었다.

“근데 성준씨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어요. 많이 닮아서요. 그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변했겠구나, 상상했어요”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전 남편은…… 아니에요. 암튼, 제가 남자 운이 별로 없나 봐요. 오늘 별 얘기를 다 하네요”

“요즘은 쓰시나요, 글?”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도통, 여유가 없네요”

“저, 신춘문예에 지원했습니다.”

“정말요?” 깜짝 놀라 하는 제니의 표정이 이내 다시 밝아졌다.

“지난번 격려와 칭찬에 용기를 내봤지요. 그때 해주신 조언을 반영해서 수정을 좀 했어요. 되든 안되든 전 이미 충분히 만족해요. 밀린 숙제를 낸 거 같거든요. 그리고……”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여자주인공 이름을 제니로 바꿨어요”

“정말요? 전 좋아요. 제 이름 걸고 잘 됐으면 좋겠어요. 잘 되면 꼭 한턱내야 되요. 우리 짠해요”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와인잔을 든다.

“그럼요. 공동 저자로 올려드릴까요?” 나도 와인잔을 든다.

공동 저자는 그렇고 스페셜 땡스 정도? 라 말하며 제니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처럼 깔깔거린다. 싱그러웠다.

 

그 이후로도 주말마다 우리는 집을 보러 다녔다. 마치 데이트라도 하듯. 그녀는 직접 만든 도시락을 싸 오기도 했고 나는 참치 샌드위치와 커피를 가져오기도 했다. 우리는 날이 좋으면 공원에서, 아니면 차 안에서 같이 점심을 나눠 먹으며 더욱더 가까워졌고 점점 가벼운 스킨쉽도 자연스러워졌다.

“이 집은 너무 예쁘게 수리가 잘 되어 있네요. 창가에 커플 티 테이블이 맘에 들어요”

“이 집은 수영장이 있네요? 여기 옆에서 바베큐하면서 수영도 하면서 놀면 정말 좋을 거 같죠?”

“저는 시내보다는 이런 한적한 외곽이 좋더라구요. 자연도 가깝고. 여유롭게 같이 산책도 다니고”

제니는 마치 자기가 살 집을 구하려 다니는 사람 같았다. 맘에 드는 집에서 살고 있을 자신을 맑은 수채화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림들은 하나같이 누군가와 같이 있었다. 그럴 때, 제니는 빛이 났다. 나는 그런 제니를 옆에서 보는 게 좋았다. 그녀의 그림 속 그 누군가의 자리에 슬쩍 나를 끼워보았다.

“자 또 드라이브 갈까요?”

그녀가 살짝 팔짱을 끼고 차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녀의 차 안에서 유재하의 노래가 나왔다. 나는 그녀를 보고 웃었고, 그녀도 나를 보고 웃었다. 늦가을 하늘은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고 붉게 물든 차는 그 노을을 가득 안으며 출발했다.

 

부르르 부르르.

한번 진동은 카톡, 두 번 진동은 메일이다.

토요일 오전에 오는 메일이라면 광고메일 확률이 거의 90프로다. 나는 무시하고 잠을 더 청한다. 젠장. 다음 금요일 밤에는 꼭 무음으로 해 놓으리라 다짐하며 잠을 깨워버린 핸드폰을 손을 뻗어 더듬어 쥐었다. 실눈을 뜨고 메일 내용을 확인하고는 잠이 확 깨버렸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고? 내가 문인협회에 등록이 된다고? 내가 작가라고? 문학에 대해서 아는 것 하나도 없는 공대 출신인 내가?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현실 앞에 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그 웃음이 단지 쓴지 헷갈렸다.

나는 돌아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삶은, 그것이 고리타분하든 통통 튀든 이쯤에서 멈출 것이고, 나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그곳에서 다시 삶을 이어갈 것이었다. 잘 적응하지 못해 결국 패잔병처럼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이곳에서의 삶이 멈추지 말고 여기서 더 살아보자고 따뜻한 어깨동무를 해오는 것 같았다. 이곳이 꿈, 돌아갈 그곳은 곧 깨어날 현실인 것만 같았다. 나는 문자를 보냈다. 공식적인 발표는 1월 1일이지만 먼저 알려왔다는 설명도 함께. 한참 후에 제니에게서 답장이 왔다.

“와! 너무 축하해요. 오늘 파티해요”

그녀의 반응에 나는 몸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이것이 꿈일지라도 그래 파티를 하자.

 

나는 음식과 촛불을 준비했고, 제니는 와인과 케이크를 사서 저녁에 집으로 왔다. 저녁으로는 스테이크를 준비했다. 혼자 해먹기 뭣해서 스테이크 고기를 들었다가 놓은 적이 몇번이나 있었다는 그녀 말이 생각났었다. 삶은 브로콜리와 볶은 양송이버섯을 한 접시에 같이 담았다. 중간광고가 없는, 2시간짜리 분위기 있는 라운지 재즈 음악을 유튜브에서 찾아서 플레이한 후에 접시를 식탁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촛불을 켰다. 제니는 박수를 쳤다. 촛불과 음악은 우리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쌌고 따뜻했고, 요리와 붉은 와인은 입안에서 왈츠를 췄으며, 우리는 중간광고 없는 그 재즈처럼 쉼 없이 속삭였다.

“그거 아세요? 제가 제니씨에게 연락했던 게 바로 신춘문예 때문이었어요. 오려낸 공모 광고 뒷면에 제니씨가 있었어요. 대단한 인연이죠. 제 꿈의 뒤에 제니씨가 있었다니”

“어머 성준씨는 행운아시네요. 지금 둘 다 가졌으니”

적당히 취기가 오른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입맞춤에 나의 손은 그녀의 젖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나 기다렸다는 듯이 한 몸이 되어 뒹굴었다.

 

“나 당신이 여기 남았으면 좋겠어요.” 제니는 내 품에 안겨서 말했다.

“한 잔 더 할래요?” 나는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식탁에 앉았다.

제니도 따라와 앉으며 말했다.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집을 보여 주었게요?”

“여기 남길 바래서?”

“아니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하고 같이 있는 게 좋았어요. 그냥 좋았어요. 집을 보러 다니면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요. 옛 사랑을 닮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봤는데 그렇다고 당신이 그 사람은 아니잖아요. 당신과 만날수록 내 가슴이 채워지는 걸 느꼈어요. 평생 비워두었다고 생각했던 곳 말이죠. 알아요. 당신은 유부남이고 떠날 사람이라는 걸. 하지만,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 그런 걸 어떡해요. 잊고 있었어요. 이런 행복한 감정. 그냥 여기서 글을 쓰면서… 같이 살고 싶어요.”

제니는 고개를 떨구고 와인잔을 잡았다. 눈물이 모란꽃처럼 뚝뚝 떨어진다. 와인을 벌컥 들이켜 목울대가 크게 울렁이는 것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녀는 외로움을 삼키고 있었다. 타국에서 얼마나 고단하고 쓸쓸했을까?

나는 혼자 잔을 비우고 채우고, 그렇게 한 병을 다 비우고는 다시 한 병을 더 가져왔다. 잔을 비우며 내면의 자신과 일대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과연 나는 여기에 남을 수 있을까? 여기에 남으면, 한국에서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버러지? 인간 말종?

나는 끝내 그녀에게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비겁했다.

“당신은 그때 그 사람 같네요. 말없이 떠난 사람”

그녀가 가면서 한 마지막 말이었다.

 

며칠 후에 유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임신했다며 기뻐했다. 늦은 임신이니까 몸조심 단단히 하라고 해주었다. 곧 정리하고 가겠다고. 내 속에서 기쁨, 미련, 안타까움, 그리움, 각각의 색을 가진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검은 회오리가 일어남을 느꼈다.

드디어 오퍼를 받고 사인을 했다. 클로징, 그러니까 잔금 정리하고 열쇠를 전달하기로 한 것은 불과 한 달쯤 후인 내년 1월이었다. 신춘문예 시상식도 1월 언제쯤이었지만, 나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메일을 보내 두었다. 어차피 갈 수도, 갈 맘도 없었다. 이제 와서 다 무용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서류 절차가 끝난 날, 제니가 찾아왔다. 모든 나무는 이제 잔치를 끝내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다. 곧, 길고 지루하고 매서운 겨울이 온다.

“제 일은 이제 다 끝난 거 같아요.”

“아직 시간이 좀 있는데, 더 만날 수 있을까요?”

“아뇨. 서로 정리해야죠. 한국에 잘 가세요”

그렇게 제니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리스팅을 위해 가져왔던 모든 물건을 가져갔다.

크리스마스 며칠 전, 그녀에게 연락했다.

“약속 없으면 우리 집에서 저녁 같이 먹을래요?”

제니는 약속이 있다며 거절했다.

“혹시 마음 바뀌거나 약속이 펑크나면 오세요, 기다릴게요”

크리스마스 이브날, 혹시 올지도 모를 그녀를 위해 다시 스테이크를 준비하고 와인과 디저트도 준비해 두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촛불과 음악도. 그러나 그녀는 끝내 오지 않았다. 초는 완전히 녹아내렸고, 나는 음식들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는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밖에는 하얀 목련 같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나는 짐들을 버리고 정리하고 남은 것들은 한국으로 부쳤다. 비워져 가는 집을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워갔고, 바람에 점점 크게 흔들리는 담벼락처럼 나는 더욱 위태로워져 갔으나 연락을 하지는 못했다. 그녀 말대로 나는 떠날 사람이었다. 같이 하지 못함을 알면서 견뎌야 할 무게를 키우는 건 솜을 지고 강을 건너는 당나귀 같은 아둔한 짓이었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흔들리기만 하는 담벼락처럼 다 보내고야 말았다.

“저 내일 떠나요”

“……”

“마지막으로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아니요. 조심해서 가세요”

“다시 올게요, 꼭”

“……”

말없이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공항에서 출국장에 들어가기 전 뒤돌아봤을 때, 멀리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내가 그쪽으로 달려갔을 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 본 것일까?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 이대로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달려가 끌어안고 같이 살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용기가 없었다. 인생을 걸고 그녀를 선택할 수 없었다. 다시 온다고 했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가? 그건 우주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온 우주를 끌 듯 무거운 발걸음으로 공항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전보다 더 작은 회사에 취직하였고, 더 야근을 자주 했으며 주말에도 더 자주 출근했다. 그래도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취직을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그렇게 예전의 그 권태롭고 무기력한 일상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아이가 있고 예전보다 흰머리가 많아졌으며 눈앞에 날파리같은 비문증이 생겼다는 게 다를 뿐. 5년여의 그곳에서의 기억은 말라버린 종이컵 속 커피처럼 옅은 자국만을 남기며 증발해갔다. 제니, 그녀에 대한 기억 역시 그랬다. 언젠가 낙엽이 제 갈 길 모르고 제멋대로 굴러가던 늦가을 길거리에서, 그녀를 닮은 여자를 본 적 있었다. 아니 그녀였다. 약간 먼 거리였고 또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히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늙고 지쳐있었다. 낙엽처럼.

그날 꿈에 제니가 나왔다. 제니는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모르는 검은 동굴 속에 있었다. 동굴 안에서는 창작가 유재하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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