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칼럼]이상묵 선생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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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비’ 


4월에 비를 맞으며 이 하이웨이를 지날 때/나는 길가의 집들을 알지 못했다/이 아침 햇빛은 온 세상을 발가벗기고/연둣빛 유니폼을 입고 행진하는 나무들/민들레꽃은 밤새 황금 카펫을 깔아놓아/나는 달려서 세상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그러나 같은 길 따라 오늘 내가 집을 향할 때/9월 하순의 어스름 길에 깔리고/문득 불을 켜는 길가의 아파트들/거긴 들어갈 일 없는 /아무리 오가도 스쳐만 가야 하는 성벽/낯선 길 이대로 달려/하늘과 땅이 맞붙은 저 끝 어디/불 끄지 않은 마을에 닿을 수 있을까/표지판 없어도 환한 거리/비 그친 골목에 들어설 수 있을까.   –석천 이상묵(2018, 10, 5)

 


 이 시는 석천(石泉) 이상묵 시인이 병상에서 투병중이던 9월 말, 신문사에 보내오신 것이다. 10월 5일자에 실린 이 시가 선생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석천 선생은 병상에서 통화하면서 “이젠 기력이 쇠해서 더 이상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네요…”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선생의 지면은 다른 글로 채워지게 됐다. 아, 이렇게 허무하게 가시다니.      


0…석천 시인은 수재(秀才)형 문인이셨다. 선생은 1940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해 서울로 올라와 서울고교를 다녔고 한국의 인재들이 모인다는 서울대 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이과(理科) 출신이면서도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고교시절부터 수 많은 문학작품을 섭렵하고 문예반 활동에도 참여했다고 들었다. 


 선생은 50여년 전에 이민 오신 ‘캐나다 한인 원주민’ 가운데 한 분으로, 직장생활(기계설계)을 하면서도 꾸준히 작품을 썼다. 마침내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에 ‘절구를 생각하며’ 외 9편으로 문단에 등단했고, 이어 왕성한 창작으로 1993년 시집 '링컨 생가(生家)에서', 96년에는 분단 50년 만에 한국 최초의 북한기행 시집인 '백두산 들쭉밭에서'를 잇달아 펴냈다. 2년 전에는 두 시집을 묶어 ‘링컨 생가와 백두산 들쭉밭'을 펴내기도 했다. 


 선생은 '창작과 비평' '문학사상' '실천문학' '작가세계' '녹색평론' 등 한국과 미국의 한인문예지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런던에서 이스탄불까지' 등 유럽기행문도 펴냈다. 특히 석천 선생은 이민생활을 하면서 동포 일간지와 본 부동산캐나다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시며 주옥같은 글들을 기고하셨다.  


0…석천 선생은 백혈병 진단에 앞서 올해 1월 19일 미국 LA에서 열린 제7회 고원문학상 시상식에서 수상했다. 이 상은 재미동포 시인 고원(1925~2008)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올해는 고원 시인의 10주기를 기념해 열렸다. 심사를 맡았던 마종기 시인은 "이상묵 시인의 시는 어디에 내놓아도 그 깊고 내밀한 은유나 가슴에 오는 절절한 내용이 절창이라는 말을 들을 만하다"며 "제 3부로 엮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의 언덕에서'는 고원 시인의 열띤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비슷한 동선을 산 듯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시상식을 마치고 돌아온 석천 선생은 아랫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고 예삿일이 아닌듯해 병원을 찾았더니 급성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받았다. 그 후 10여개월간 키모치료 등  여러 노력을 해보았지만 이내 회생하지 못한 채 생을 마치게 됐다. 이 병은 특히 연세드신 분들은 치료가 힘들다고 한다.  


 2주 전 석천 선생이 입원중인 프린세스 마가렛 병동을 찾았을 때만 해도 기운만 조금 없지 정신은  또렷하고 맑으셨다. 선생은 나보고 “신문사 일도 바쁠텐데 뭐하러 왔어요?” 라며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해요”라고 당부하셨다. 그런데 그 병동이 말기암 환자들이 가는 palliative 실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근본치료보다는 일시적으로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고 편안히 생을 마감하도록 배려해주는 그런 곳… 


0…석천 선생과는 오랜 인연을 갖고 있다.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필자로서, 또한 인생의 선배로서 종종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은 특히 내가 현재의 신문사를 맡자 기꺼이 격조높은 글들을  보내주기 시작하셨다. 나는 그때 큰 힘과 용기를 얻었다. 이런 실력있는 분이 글을 써주시니… 


 선생은 ‘돌샘’(石泉)이라는 뜻의 아호가 말해주듯, 돌샘물처럼 맑고 투명한 정신세계를 갖고 계셨다. 그래서 생전에 그는 불의나 일상의 허접한 것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셨다. 그래서 다소 도도해 보이기도 했다. 또한 사상적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외로워 보였다. 선생은 꼭 필요한 모임에만 얼굴을 나타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슬픔의 와중에도 선생의 부인께서 침착하게 대처하시는 모습이 참 의연하다. 부군과 함께 인텔리 출신이신 이정준 여사는 부군의 가시는 길을 지켜보면서 “등잔불이 꺼져가면서 기름도 말라가는 것처럼 우리 생도 그렇게 사위어가는 것 같다. 그동안 정신적으로 힘이 들었지만 생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고 잔잔히 전하셨다.  

 

 지금도 내 책상 위엔 석천 선생이 남기고 가신 장편소설 '칼의 길’과 시 전집 <링컨 생가와 백두산 들쭉밭>이 꽂혀 있다. 이민사회에서 그 정도의 지적 수준과 자기 성찰, 글 솜씨가 구비된 작가도 드물 것이다. 외로운 타국에서 그처럼 품격있고 지조있는 분을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는 ‘석천’이라는 큰 보배를 잃었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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