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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79)-사도 빌립 순교 기념교회(Martyrion of St. Phi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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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크레오파트라가 알몸으로 목욕하며 안토니오와 즐겼던 그 온천장에서 쉬기를 원하시는 분들을 뒤에 남기고, 저~만큼에 보이는 야산으로 오르는 길은 눈에 보이던 것보다는 훨씬 멀고 굽은 언덕길이었습니다.

그 길 초입에 제법 구색을 갖추어 복원된 야외극장이 있었습니다. AD 2세기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그레코-로만식으로 지은 원형극장으로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하는데 아직 객석은 다 복원이 안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극장은 현존하는 그레코-로만 극장들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 중 하나라고 하네요. 중앙에 황제를 위한 로열석이 별도로 있었으며, 연극 공연과 더불어 때로는 검투사(Gladiator)들의 목숨을 건 경기도 있었으며, 사자와의 결투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우리가 본 외양은 전면에서 봤을 때는 부서진 자태의 복원이었지만, 내부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그레코-로만 극장 장식들 중 가장 완벽하게 잘 보존된 실내 장식품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원형극장 주위로 로마 시대의 공중목욕탕의 유적이 남아있고, 한참 더 언덕을 넘어가면 히에라폴리스 유적 중 유명한 큰 공동묘지(necropolis)에 1,200개 이상의 석관이 지상에 널려있다고 하지만 다리가 아픈 우리들에겐 관심 밖이었습니다.

원형극장을 나와 또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제법 만만찮은 야산의 언덕길을 헉헉거리면서 올라간 곳에 있는 “사도 빌립 순교 기념 교회”의 폐허!  가는 곳마다 폐허이기에 이제 즈음에는 폐허에 꽤나 익숙해져 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폐허를 보는 마음이 찌잉~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초대 교회 시대 기록에 나오는 두 사람의 “빌립”이 있습니다. 한 분은 “사도 빌립”으로, 요한복음 1장43절에 기록된 대로, 최초로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예루살렘 신자의 급증으로 생긴 필요를 위해 선택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입니다.(행 6장 5절)

두 사람은 모두 복음 전도에 불타는 마음을 가졌었고, 후기 역사에 보면 그들의 삶이 서로 잘 어울려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어느 “빌립”인지 혼동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사도 빌립”이라고 쓰고, 다른 한 사람은 “빌립 집사” 혹은 “전도자 빌립”이라 쓰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사도 빌립”이 여러 번 기록되었으나, 누가에 의해 기록된 사도행전에는 단 한 번 1장 13절에 나올 뿐, 그 후, 8장에 기록된, 사마리아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에디오피아 재무장관을 회심시키는 도구로 사용된 빌립은 바로 “빌립 집사”였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이 마지막 여행의 시작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갈 때, 가이사랴에서 “빌립 집사”의 집에 여러 날 거하기도 하였습니다.(행 21:8)

“사도 빌립”은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과 가까운 북 유대 지방의 한 마을, 벳세다 출신입니다. 그러나 그의 헬라 식 이름으로 볼 때, 그의 가문은 알렉산더 대왕이 헬라 문화를 세계로 퍼트릴 때인, 즉 로마가 점령하기 전, 헬라 문화와 헬라 언어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생존 당시 유대 지방에서는 아랍어가 주로 사용되었고, 행정언어로는 라틴어가, 그리고 상업언어로는 헬라어가 통용되던 시대였으니까요.

“사도 빌립”은 오천 명 군중을 먹이기 위한 양식을 사는데 필요한 비용을 계산하기도 하였고(요 6:7), 또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가까이하려 할 때 그들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요 12:21).

초대 교회의 문서들에 의하면 “사도 빌립”은 터키 서부 히에라폴리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갈라디아에서 지금은 프랑스 땅이 된 당시의 고울(Gaul)까지 이주하는 사람들을 따라가서 복음을 전파한 유일한 사도라고 합니다.

그가 다시 히에라폴리스로 돌아왔을 때,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매달린 채,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에 앞서, 자신의 시신을 “예수님처럼 세마포로 싸지 말고 파피루스로 싸라”고 유언했다는데, 주님과 동일한 취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겸손함의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 8각형으로 되어 있는 “사도 빌립 순교 기념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이 도시가 주교가 있는 큰 교회로 발전되었을 때, “사도 빌립”을 위하여 그의 무덤이 있는 곳에 큰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랜 풍우와 많은 지진에 8각형 교회를 덮고 있던 돔은 다 부서지고, 지붕도 없이 몇 개 안 남은 돌기둥과 돌 문틀뿐이었지만, 그 문틀마다 다윗의 별이 조각되어 있었고, 십자가의 모양이 조각되어 있어 우리를 반기며 그 문을 지나게 하여 주었습니다.

큰 원을 그리며 서 있는 그 문들을 지나면서 이는 상념, “과연 믿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한 바퀴 돌아오니 바로 아까 그 자리였습니다.

사도 빌립이 전도한 지역은 사도 바울이 전도한 지역과 구별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면서, 로마를 통해 스페인까지 가기를 노력하였지, 아시아 남쪽에는 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바울은 로마서 15:20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이 “빌립 사도가 전도한 바로 이곳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들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바로 지척에 있는 골로새 교회에도 한번 들리지 않기도 하였으니까요.

부서져 문틀만 남은 그 문들을 통해 한 바퀴 돈 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언덕바지에 서니, 멀리 하얀 목화의 성이 보이고 그 위에서 오밀조밀 움직이는 사람들이 점.점.점.입니다.

이제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리로 내려가야겠지요. 호텔로 돌아오니 모두 파김치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럴 때에는 온천이 최고지요.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푸욱 담그며 나오는 탄성! 아~~~! 시원하다!

“믿을 X(사람) 한 사람도 없다”는 유머가 생각나 혼자 씨익~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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