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s2000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www.budongsancanada.com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38 전체: 320,154 )
흔적을 찾아서(62)-에베소(Ephesus)(1) '누가의 가묘(假墓)
bs2000

 

한시간 정도 달려온 버스가 선 곳은 오늘의 주 행선지인 에베소 유적지의 주차장이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하차한 우리를 가이드는 오히려 에베소 반대편으로 인도하여 갔습니다. 누가의 묘가 있는 자리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을 써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행적을 말해 주고, 사도행전을 써서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를 말해준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누가, 그 누가가 누워있는 곳이란 말입니다.

영국의 고고학자 T.J. Wood가 다른 곳을 발굴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누가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오래전 세워졌던 기념 건물은 다 부서진 채 몇개의 주춧돌만 남은 폐허였습니다.

야산 기슭에 철조망에 둘러싸여 있는 폐허, 무너진 돌 덩어리들… 그래도 그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오늘도 예수님의 행적을, 성령의 역사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하여 주고 있는데… 인생 무상이란, 아니 무덤 무상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누가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그가 의사였다는 것을 누가 복음의 문맥으로 추론하고, 또 바울의 서신서, 골로새서 4장 14절에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라는 말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지요.

성경에 소개된 그에 관한 기록과 교회사가들의 증언 및 전승을 토대로 많은 성경 학자들은 사도행전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라는 단어에서 누가는 바울의 사역 초기에 바나바와 함께 일했던 수리아(현제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의 헬라인 개종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바울과 함께 로마에까지 동행하였다고 추론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행 11:22-30; 13:1-3; 14:24-28; 15:30-41; 27:1, 28:15등).

누가는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네압볼리로 가던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바울의 개인 의사로 함께 하면서 2차 선교 여행을 끝까지 동행하였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지만 바울을 만나 그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단편적으로 기록한 것들과 후일 요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모아서(눅1:1-2) 누가복음을 기록하였고,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면서 사도행전까지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혹자는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바울이 유럽(네압볼리)에 첫발을 내딛게 된 데는 헬라 사람인 누가의 조력이 컸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바울의 동역자가 된 누가는 바울과 함께 빌립보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타지에서 복음 사역을 할 때도 계속해서 빌립보에 머물며 사역했고, 후에 3차 선교여행에 나선 바울이 다시 빌립보를 방문할 때 합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행 20:5-6).

그후 바울의 1차 로마 투옥 때에도 함께 동행하여 거의 2년 정도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 후반부 바울의 로마 여행 기록이 매우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납니다(행 28:8-9). 심지어 바울이 순교 직전 2차 로마 투옥 때는 누가만이 바울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딤후 4:11).

누가가 누가복음에서는 “테오빌로 각하”라고 수신인을 밝혔지만, 사도행전 첫 줄에서는 “데오빌로여”로 시작하는 편지의 수신자, “데오빌로”라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전승되어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사용된 “데오빌로”라는 단어는 수신자의 이름이 아니라 헬라어로 “데오스(θεος) = 하나님, 전능자” 와 “필로스(philos) = 사랑하다”의 합성어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각하여"라는 뜻이라고 하니 그 이유가 또 궁금해집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로마 감옥에서 바울이 에베소 성도에게 편지를 써서 “두기고” 편에 보내려 하였으나 “두기고”가 잡히게 되자 “두기고”는 그의 주인 “아킬리우스 클라브리오” 집정관에게 그 편지를 맡겼다고 합니다.

“클라브리오”는 그 편지를 원로원 의원인 “클라비아 클레멘스”에게 전달하였는데, 그 편지로 인해 “클라비아 클레멘스”는 부인과 함께 예수를 믿게 되었답니다.

누가는 클레멘스 의원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바울이 사역하는 동안 모아둔 자료를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여 클레멘스 의원에게 보내 그의 신앙을 도와주고자 첫 편지인 누가복음에서는 “테오빌로 각하”라 쓰고, 두번째 편지인 사도행전 첫 줄에서는 “데오빌로여”로 시작하며 수신자인 “클레멘스” 의원의 안위를 보호하려 하였던 것으로, 이것은 당시 기독교의 박해를 피하기 위한 암호 방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듯 “예수의 일생을 가장 완벽하게 묘사한 복음서”로 칭송 받으며, 구세주의 행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려 시도한 누가복음과, “사도들의 사역을 자세히 기술”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 못지않게 생생하게 기록한 “유일하게 성경을 기록한 이방인”이 되었지만 자신이 두 권의 성경을 기록하였으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채 오늘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성령의 은혜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여러 성지 순례 가이드들은 전승해 오는 이야기들이라는 단서를 붙인 채 여러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원래 누가는 남의 집에 종살이를 하도록 집안이 어려웠는데, 누가의 어머니가 재혼한 사람이 고위관리였기 때문에 의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는 등, 누가가 그 신분 때문에 첫 사랑에 실패하고 혼자 살았는데 그렇기에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알게 되고, 평생 그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 등등 누가 들어도 그럴듯한 누가의 이야기는 누가 가이드가 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가 봅니다.

그의 말년에 관하여서도 많은 전승들이 있는데, 혹자는 그가 74세까지 살면서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비두니아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그리스에서 순교 당하였다고도 합니다.

사도행전 후서를 펴낸 토머스 E 슈미트의 기록에 의하면 누가는 주로 스페인, 소아시아(터키), 이집트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실로 광활한 지역입니다.) 주후 80년 그리스에서 자연사 했다고 기록합니다. 성경기록에 없는 부분이기에 우리는 단지 참고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여차여차하게 누가의 유해를 에베소에 가져와 묻었다가, 그 후 이곳에 안장을 했었는데, 그 한참 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이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 후, 머리는 로마 베드로 성당에 안치하고, 몸은 이탈리아, 파도바 시에 있는 성 기우시티나 교회에 보관 중이라 합니다.

결국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다는 것인데….  교회들이 서로 성물(聖物)을 유치하기 위하여 벌이는 욕망의 끝은 어디까지 일까요?

지금은 철조망 너머로 폐허가 된 채 안내 간판이 쓸쓸히 설명해 주는 “누가의 가묘” 유적지이지만, 한글로 쓰여진 안내 간판만이 한국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온다는 것을 대언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