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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47)-짠물이 단물 되는 시발점 가이사랴(Caesarea Maritima)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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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지중해 바닷물이 하얗게 부서지며 포말을 이루고, 그 포말마다에 부서지는 찬란한 햇빛. 하늘과 바다와 땅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지중해변의 고도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도시 이름이 ‘가이사랴’인 것은 Caesarea, 즉 가이사(Caesar), ‘로마황제에게 바친 도시’라는 뜻으로, 바다 건너 저 편에 앉아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의 권력층에 상납하며 자신의 부귀영화를 보장받고자 했던 헤롯의 뇌물성 작품입니다.

그러니 잘 지어지고 정비된 항구 도시이자, 유대 지방을 관할하는 로마 총독부가 있었던 곳. 그래서 많은 교역이 이루어지고, 많은 여행객들을 더 큰 세상으로 옮겨 주던 항구 도시였기에 그 옛날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면서 배에 실렸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정립된 “여호와, 야훼”을 믿는 구약 세계, 유대 땅에서의 신앙에서, 사랑과 성령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며, 부활을 믿는 신약 세상의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세계를 향하여 땅 끝까지 나가는 시발점이 된 가이사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땅 끝은 지중해의 서쪽 끝에 서있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열고 있는 좁은 해협, 지브롤터로, 지중해가 대서양과 만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곳에서 지중해 너머를 바라 보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까지 가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었으나 결국 그 중간지점인 로마에서 그 여정을 마치게 되었던 것이지요. (롬 15:23)

그러나 그의 마지막 선교지로, 선교사가 아니라 죄수의 신분으로 떠나던 항구였지만 결국 그의 바램 대로 세계로 뻗어 있던 로마 제국의 길을 따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된 바가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유대 땅을 떠나 머나먼 서쪽 땅, 바로 로마 제국의 속주인 이스파니아(현재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포교하려고 선교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자로 만든 사람의 수는 극히 적었다고 합니다. 이에 야고보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후 헤롯왕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되어 최초로 순교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헤롯왕에 의해 처형된 야고보는 제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돌로 만든 배에 실려 스페인 북서쪽으로 향해 보내졌다고 합니다. 이 후 기독교도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자 이 전승을 통하여 성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 성자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당시 갈리시아는 레꽁끼스따(Reconquista; 718년부터 1492년까지,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을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 스페인어로 ‘재정복’이라는 말)의 열기가 고양되던 곳이어서, 성 야고보의 전설은 당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언제나 볼 수 있게 되었답니다.

9세기부터 가톨릭에서는 이슬람 침략에 대항하는 방법의 하나이자 북부 스페인 사람들이 이교도로 개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순례를 장려했습니다. 이 길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순례하는 스페인에서 프랑스까지 이어지는 산티아고(야고보) 순례길(El Camino de Santiago)인 된 것입니다. 야고보를 스페인어 권에서는 산티아고(Santiago)로 부르지요.

동방의 자그마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서방의 큰 나라에 와서 살면서 그 종교를 믿으며 살던 사람이 이제 그 서방전도의 시발점이 되었던 지중해변의 도시 가이사랴에 서서 저 멀리 큰 바다 너머에 있는 로마를 바라보며 폐허를 거니는 감회를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유대나라와 로마제국의 모든 영화는 이렇게 폐허가 되어 관광객을 부르고, 그 권력의 정점에 서서 "조금 더…"를 바라던 욕심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후세들의 이야깃거리 밖에는 안 되는데….

이럴 때 언어의 마술사가 되지 못함이 후회를 키우기도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 1:24-25)"

 

폐허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매년 이스라엘 음악제 등에 훌륭하게 사용되는 야외극장의 음향 전달은 대단하였습니다. 그 무대에 올라서서 아주 투명하도록 강렬한 태양의 조명을 받으며 노래를 하는 순례자들의 음향이 아주 청아하게 멀리 객석에까지 들려왔습니다. 바다가 조금 더 저 편에서 파도를 치는데도 파도 소리는 안 들리고·····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을 받은 자여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노라"

발에 차이는 것마다 다 유적이요 유물들입니다. 그 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장인정신, 예술성!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혼은 살아서 우리를 부르며 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데, 오늘의 우린 과연 앞으로 2000년 후의 우리 후손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발달된 문명의 이기들? 컴퓨터나 자동차들? 부서지고 녹슨 이런 것들의 잔해를 보면서 우리의 후손들은 무어라고 말 할까요? 그 옛날의 권력에 동원된 노예들의 삶이 불쌍하다고요? 글쎄요.

그네들에겐 이런 장인정신의 발휘가 생업이었을 테고, 오늘의 우리 또한 생업을 위해서 건설을 하는 것인데 그 근본이 뭐가 다르겠습니까!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십자군 전쟁의 상흔을 보면서 거니는 감회는 두고두고 나의 마음속에 남을 것 같았습니다.

종교와 예술과 전쟁의 승리와 패배 속에 교차되는 희열과 참담함. 그 모두가 결국은 조금 더 잘 살아보자는 살아생전에 펼쳐지는 파노라마일진대, 그 유한한 삶의 후에 오는 영원한 삶은 과연 어떠할까요?

그 죽음 후에 있을 영원한 삶을 위해서 유한한 삶을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삶의 투쟁! 승리하기 위한 노력을 위해서 끌어 들이는 수단이 어려서는 공부와 젊어서의 노력과 나이 들어 찾는 단물 같은 참 믿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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