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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에서 오는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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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맘, 아이들이 우리보고 칭크라고 불렀어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유치원에서 돌아온 딸과 아들이 물어온 그 말은 지금도 바로 어제 일처럼 내 가슴에 메아리쳐 온다. 난생 처음 학교라는 곳을 다녀온 아이들이 듣고 온 이 말은 나에게 던져준 커다란 충격이었다. 순간적으로 나의 손이 미친 곳은 영한사전, 그 말의 뜻이 경멸적으로 부르는 “중국인”이라 적혀 있었다. 이 시대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인종차별이란 화제로 만들어 얼마나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킬 수 있을까? 


 그때 우리 아이들은 자기들이 이곳 백인들과 다르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런 차별대우를 받는 말을 들을 것으로 여기기엔 철이 들지 않은 나이였고 너무 순진했다.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얼마나 많은 마음의 아픔을 갖고 자라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온몸에 전율이 느껴짐을 숨길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학교를 방문하여 담임선생을 찾아갔다. 


 중년쯤 된 여자 선생이 복도로 나를 향해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뜻밖의 학부형 방문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으나 나를 보자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한국적 예의를 지켜 공손하게 내가 누구의 엄마이며 왜 이곳을 찾아왔는지 설명한 후, “처음 학교를 입학한 순진한 이아이들 마음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가?“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녕 피해자가 느끼는 것처럼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리고 이 아픔이 어린아이들 가슴속에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괴롭힐 수 있는 상항인지 그녀에게는 이해가 안될 일이다.


 담임선생님은 “미세스 백, 염려말고 돌아가세요.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라고 일러 주었고, 나는 그녀의 말을 믿고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만 해도 토론토 변두리 학교들은 백인위주로 이루어졌고 그 일이 있은 후 우리 아이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려서 친구도 만들고 예쁘게 자라 주었다. 


 딸은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면서 수석으로 졸업했고, 아들은 영재들의 학교로 보내져 특수 교육을 받은 후에 그곳을 떠나 상급반으로 진학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이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아이들이 가톨릭 학교로 들어갔고, 학교의 교육방침도 약간씩 달랐다. 딸이 처음 익혀야 하는 불어, 그것을 따라가기 위해 혼신을 다해 노력하면서 새 환경에 잘 적응하였고, 학교 공부도 월등하게 잘 해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누나인 딸과는 조금 달랐다. 남달리 이해가 빨랐던 아들에게는 학교 과목 중에서 특히 음악 같은 것은 이미 개인적으로 습득해서 다른 학생들을 앞서 있었기에 더욱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이 자기에게 별로 도전이 없었던 것이었다. 음악시간에 아들이 전혀 입을 벌리고 노래를 하지 않아 음악점수가 나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고 음악선생을 찾아 갔었다. 그때 나는 아들이 료얄 콘서버토리(Royal Conservatory)와 키아니스(Kiwanis)에서 받은 많은 트로피, 상들을 들고 가서 선생에게 보이면서, 아들이 음악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배운 것들이라서 흥미의 대상이 되지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일러주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녀의 가르침이 재미가 있었다면 아들은 적극성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선생은 아동의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고 아이들의 호응도 잃은 듯 했었다. 아동 심리를 조금 이해하고 칭찬을 곁들여 가르쳤다면 아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선생은 그렇게 칭찬에 인색한 사람처럼 보였다. 부끄럼이 많은 아들은 일단 자기가 흥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 과목은 공부를 하려들지 않았다. 나는 아들과 딸을 통해 남자 아이와 여자아이들의 다른 성장과정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 성장도 관심을 가지는 기회가 되었다.


 아들과 딸이 고등학교를 진학했지만 그들의 배움의 과정에서 오는 정체성의 갈등. 번듯한 가면을 쓰고 이민자의 자녀들에 대하는 부당한 처사를 목격하면서 이곳에 살아가는 한 소수민족들이 피할 수 없는 현실, 마치 내가 직장 생활에서 격은 것처럼 여겨졌다.


 캐나다의 명문, 백인 위주 남자사립학교에서 아들이 겪는 많은 갈등은 여자학교와 달리 여러 면에서 사춘기 사내 아이들간에 드러내는 노골적인 행동과 언사들로 인해 집에 돌아온 아들은 혼자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들은 이런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해서 다른 백인 급우들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그 학교의 장학생으로 졸업하여 우리부부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공학도가 되었다.


 나는 늘 아이들에게 일러준 이야기가 있다. 이 사회를 살아갈 너희들의 무기는 우람한 육체도 아니요, 돈도 아닌 지식과 지혜이다. 누구도 그것은 빼앗아 갈수 없는 것이라고… 하루는 아들이 집에 와서 나에게 “왜 엄마가 이곳에 이민을 택했느냐”고 물을 때 큰 충격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반면 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에게 내색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맘,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늘 나를 안심시켰다. 절대 엄마가 걱정할 것은 표현하지 않는 강인한 딸. 


 이제 아이들이 성장하여 결혼적령기가 됐고, 또 다른 갈등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배우자를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 등. 우리 세대의 바램은 동족간의 결혼이지만 정작 그들의 선택이니 어떤 배우자를 만나든 따라가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위로 해본다.


 내가 이민 오는 부모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자녀들이 문화뿐만 아니라 정체성으로 겪는 혼동과 갈등이 얼마나 그들을 힘들게 만드는지… 부모들이 겪는 이민사회 어려움의 몇 배로 하루하루 겪으면서 외롭게 자기들의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우리가 그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줄 수 있다면 대신하겠지만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오직 부모의 깊은 이해와 사랑뿐이라고.  


 미국의 이민 연구 학자에 따르면 이민생활에 있어 가장 힘든 세대가 1세나 3세가 아닌 2세라고 한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아이들이다. 영원히 정체성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우리 아이들이 1세의 도움없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우리들은 푸른 희망을 안고 이곳에 와서 폭풍우 같은 세월을 헤쳐 오면서 쓰러지지 않고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인종 속에 뿌리를 내렸다. 자녀들에는 비판보다 많은 격려와 사랑을 끊임없이 베풀어야 이곳에서 바른 삶을 이끌 수 있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에 적은 장애물이라도 옮겨놓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만 있다면… (201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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