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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5백만 년 후, 그때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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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일이란 일은 모두 2,500만 년을 한 주기로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 즉, 2,500만 년이 될 때마다 다시 원상의 주기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2,500만 년이 지나면 그때 우리는 윤회에 윤회를 거듭하다 지금과 똑같이 이렇게 여기 모여 우리 곁으로 온 별을 쳐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1997년 42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이순원의 ‘은비령’에 나오는 대목이다. 작품에는 미국의 천문학자 홀의 유머가 등장한다. 하버드 천문대에서 일하던 그는 친구와 함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잠시 생각에 잠기던 천문학자는 식당주인인 중년의 부인에게 2,500만 년 주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2,500만 년 후 다시 올 때까지 점심값을 외상으로 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한다. 여주인은 “물론 해드려야죠” 하며 흔쾌히 수락하지만 “2,500만 년 전에도 손님께서는 우리집에서 식사를 하셨을 거고, 그때도 지금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밥값은 외상으로 할테니 2,500만 년 전 외상은 주고 가시죠”라며 재치 있게 되받는다.

 

 ‘은비령’은 애초 강원도 출신인 이순원이 그려낸 상상 속의 문학작품 무대였다. 강원도 한계령 인근의 고개를 연결고리 삼아 잔잔하면서도 애절하고, 한편 아름답지만 안타까운 중년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풀어냈다. 소설이 큰 인기를 끌면서 강원도는 이곳의 공식지명을 ‘은비령’으로 붙였다.

 

칼럼을 읽는 독자들이 2,500만 년 전에 꼭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살았는지, 2,500만 년 뒤에 우리가 다시 토론토에서 만날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윤회사상을 믿지 않는다.

 

최근 외신에는 중국 심양에서 1억 2,500만 년 전 백악기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룡뼈를 과학자들이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500만 년보다 무려 다섯 배나 긴 세월 전에 공룡이 살았다고 한다. 솔직히 과학자들이 추정하는 1억2,500만 년이란 세월도 허황하게 느껴진다.

 

칼럼 첫머리에 소설의 한 대목을 꺼낸 것은 중년의 사랑과는 전혀 관계 없는, 지구온난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최근 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는 지구온난화와 관련한 피해사례 보고서를 냈다. 온난화가 진행되면서 캐나다 원주민들의 식량난이 한층 심각해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10월 21일자 CTV뉴스는 보고서에 언급된 사례를 전했는데, 온타리오 북부와 유콘지역 원주민들이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온난화 때문에 평균기온이 올라가 북극에 가까운 지역주민의 생활환경이 개선될 것 같지만 전혀 아니었다. 외부와 연결도로 등이 충분하지 않아 연중 고립된 지역에 사는 이들은 전통적으로 사냥이나 어업, 채집 등을 통해 식량을 확보한다. 그러나 온난화가 심각해지면서 겨울에 강과 바다가 예전만큼 두껍게 얼지 않아 사냥을 갈 수 있는 활동영역이 줄었다. 대신 익사와 같은 식량활동의 위험은 커졌다. 여름에는 강물의 수위가 예전보다 낮아져 카누 등을 타고 다니기 힘들어졌다고 한다.

 

생활환경의 변화로 식량위기를 겪는 것은 북극에 사는 동물도 마찬가지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북극곰 사진은 온난화를 상징한다. 서식동물의 개체가 줄어들면 원주민의 식량난도 가중될 수밖에 없다. 원주민들은 인권단체와 인터뷰에서 “얻을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은 최근 수십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줄었고, 대신 환경변화에 따른 위험은 더 커졌다”고 입을 모았다.

 

결국 이들은 대형마트 등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원주민 거주지역의 물가가 토론토보다 30% 이상 비싸다는 것이다. 가구당 수입이 캐나다 평균보다 낮은 원주민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다. 화석연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원주민들에게 지구온난화의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요즘엔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는 용어가 일반화돼 있지만, 이는 거대 석유자본이 화석연료의 과도한 사용에 따라 발생한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의 위험성을 축소하기 위해 퍼트렸다. 가치중립적이라는 점에서 기후변화라는 단어가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구촌의 기온이 해마다 오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용하는 단어부터 위험을 직시해야 한다.

 

10여 년 전, 다니던 신문사에서 환경과 에너지 분야를 결합한, 당시로서는 제법 획기적인 국제산업전시회를 기획했는데, 지구온난화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2010년 토론토대 매시칼리지에서 저널리즘 펠로우십 연수를 하며, 국제사회 환경문제를 강의하는 스티븐 베른슈타인 교수와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멕시코 유엔기후회의를 앞두고 ‘세계 각국 정상이 실질적인 기후변화 대책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면서 “각국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뭐냐’고 질문했더니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 초 과학자들은 2020년을 기점으로 국제사회가 온실가스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 2020년이 벌써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온실가스 저감을 위한 국제사회의 논의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다시 소설 ‘은비령’으로 돌아가서, 2,500만 년 전 우리는 지구온난화를 어떻게 이겨내고 끝내 살아 남았을까. 아니, 2,500만 년 후 돌아왔을 때 우리가 발디딜 아름다운 이 지구는 여전히 존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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