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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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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6월26일, 포병 장교였던 안두희는 서울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안두희는 현장에서 체포됐고, 군 당국은 다음날 ‘우발적 범행’이라고 발표했다. 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석 달만에 그는 징역 15년으로 감형을 받았다. 또 6.25전쟁이 발발하자 소위로 군에 복귀했다. 1951년에는 국방장관의 지시로 잔형을 모두 면제받은 뒤 육군 소령으로 제대했다.

1996년 10월 23일. 경기도에서 시내버스 운전사로 일하던 박기서씨는 40cm 길이의 작은 몽둥이, ‘정의봉’을 들고 안두희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안두희의 부인을 결박한 뒤 준비한 장난감 권총으로 안씨를 위협했다. 백범 암살의 진상을 제대로 밝히라는 것이었다.

 중풍으로 투병 중이던 안두희는 우물쭈물 얼버무렸고, 격분한 박씨는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안두희의 온 몸을 난타했다. 안두희의 목숨이 끊어지자 박기서씨는 경찰에 자수했다. 박씨는 이후 ‘역사가 안두희를 처벌하지 않으니 내가 사명감을 갖고 죽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가 안두희를 죽인 동기 가운데 하나는 권중희씨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책이다. 권씨는 이 책에 백범 암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기울였던 40여 년의 노력을 담았다. 사건 이후 안두희에 대한 처벌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 분노한 권씨는 1950년대부터 정부에 탄원을 넣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안두희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듯한 잡지 인터뷰를 하자 직접 죗값을 묻기로 결심했다. 권씨는 1987년을 시작으로 90년대 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안씨를 응징했다. 이 과정에서 권씨는 구속 수감되는 곡절도 겪었다.

20여 년 전 안두희의 죽음과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단어 하나는 ‘정의봉’이다. 몽둥이 하나로 역사의 심판을 올바르게 집행할 수 있다면 세상 나무를 모조리 깎아서라도 정의봉을 만들어야 할 터이다.

 하지만 역사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안두희는 정의봉에 맞아 절명했지만 여전히 역사의 심판은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개화기 어수선한 틈에서 친일행위로 동족의 고혈을 빨아 배를 채우던 이들은, 해방이 되자 빨갱이를 때려 잡는 반공투사 변신해 여전히 잘 먹고, 잘 산다. 독립을 위해 애썼던 많은 분들, 그들의 자손은 타국을 전전하며 이방인으로 개고생을 하는데, 자유 대한민국에서는 친일 배신자의 후손들이 정치인으로 혹은 검찰의 칼을 쥐고 세상을 호령한다.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대법원 판결까지 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조치까지 머뭇거리면서 말이다.

이렇듯 약육강식, 힘과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역사에서 심판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행하는 심판 역시 힘의 논리에 지배 당하기 때문이다.

 각자 부르짖는 정의에 대한 잣대, 기대하는 정의 실현의 정도도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는 게 아니라 시효조차 힘있는 자들 멋대로 정해진다. 아예 시효 자체를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그런 난장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한국 정치판이다. 한 때는 ‘군바리’들이 겨눈 총부리가 정의봉이었고, 이제는 검찰이 휘두르는 칼이 정의봉 행세를 한다. 애완견에 사과 한조각 들이미는 ‘개 사과’ 정도로도 사람들이 요구하는 정의는 가볍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이 불완전하다고 슬퍼할 이유나 여유는 없다. 성경이 심판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 히브리서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장27절)”라고 말한다. 그 심판대는 부정축재를 일삼는 재벌이나 정치인, 고관대작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를 향해 시시각각 진격해오는 대적들에게 있는 힘껏 정의봉을 마구 휘둘렀던, 바로 나 자신이 서야 하는 심판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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