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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씁쓸함에 대하여
allellu

 

최근 어느 자칭 ‘선지자’의 유튜브 방송을 봤다. 기도 가운데 곧 선출될 국민의힘 대표에 대한 언질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실로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선지자는 한국 여당을 이끌 후보를 만나서 축복기도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조만간 서울에서 1980년 광주와 유사한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고도 예언했다. 그런 기도응답을 받은 뒤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는데,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하며 자유우파와 주사파가 피비린내 나는 대결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 ‘선지자’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인간은 기도를 한다. 나무에게, 돌에다, 때로는 역사 속의 유명한 인물에게도 기도한다. 인간이 기도하는 이유는 욕심, 좋게 말해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다. 정당의 대표로 누가 선출될 것인지에 대한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선지자’의 마음 속에 가득 찬 것도 결국은 욕심이다.

‘기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E.M. 바운즈가 쓴 ‘응답되는 기도’(드림북출판사)에는 인간들이 기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잘 드러난다. 저자는 “기도는 약속을 풍부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해 준다. 기도는 이 약속들을 계속 유지시켜 열매를 맺게 한다. 약속은 기도에 영감을 주고 활력을 불어넣지만 기도는 약속을 찾아내어 그것을 실현시킨다”고 강조한다.

바운즈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도 힘주어 말한다. 그는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고 그분으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으면 행하지 않으실 일을 행하도록 한다”면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 순수한 기도는 절박한 상황들을 면제시킨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또 “기도는 인간에게 다가오는 모든 해악들을 없앨 수 있다”고 덧붙인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바운즈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열심히 간구하기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모든 일이 이뤄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바운즈의 설명은 자칫 하나님이란 존재가 인간들의 내놓는 기도라는 ‘기특한’ 행위에 감동해서 그분의 계획과 언약을 수시로 바꾸시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게 할 수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겠다는 인간의 악마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제 아무리 성도가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뜻은 바뀔 수 없다. 아니 그분은 성도의 기도에 맞춰 언약과 뜻을 변경하지 않으며, 그분의 약속도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 기도의 주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은 인간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멸망 받을 죄인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은 죄인 중 괴수라는 것을 성경은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욕심으로 가득찬 인간들에게 기도를 토해내도록 하신다. 그분의 언약성취를 위한 도구로서 말이다.

출애굽기 2장 23절은 이집트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됐다”고 기록한다. 모세를 투입하기 위한 하나님의 설정이다. 야곱과 요셉을 통해 이집트로 내려간 이후 400년이 흘러 때가 되자 아브라함에게 미리 힌트를 주시고 약속하셨던, 이미 창세 전에 그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끄집어 내시기로 했던 약속을 기도를 통해 신실하게 이뤄가시는 것이다. 사사기에서는 죄악에 빠져가는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에 넘기시고는 그들이 ‘부르짖을 때’(삿 3장9절, 3장15절, 4장3절, 6장6절, 10장10절 등) 구원하시는 장면이 반복된다.

바운즈는 성경에서 응답 받지 못한 기도 세 가지를 꼽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와 밧세바와의 불륜을 통해 낳은 어린아이의 생명을 위한 다윗의 기도,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바울의 기도다. 하지만 이 기도들은 정확하게 응답됐다. 응답되지 않았다는 것은 기도를 드린 ‘자기의 유익을 우선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그렇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확실하게 응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야 했다. 그것이 창세 전 언약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후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부터,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 사건, 성전 제사 등을 통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반복해서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그분이 예정하시고 준비하신 방법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겠다는 계획을 이미 다 밝히셨다. 그 언약에 따라 십자가를 세우셨다.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다. 바울의 기도에도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기도응답에 대한 말씀을 기록한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그 내용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역으로 성도들이 구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유익이 아니라 성령이다. 다른 성경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육신을 입고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 질병에서 고침 받기 위해, 육신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도들의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자식이 아버지께 드리지 못할 기도는 없다. 그러나 한 번 더 되새겨야 할 것이 있다. 그분의 응답 방식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두 구절의 공통점은 ‘마음’에 있다. 구하는 것은 전부 너희들 요구하는 대로 이뤄주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칭’ 선지자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들의 마구 씨불이는 설교에 두 손 들고 ‘아멘, 아멘’ 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오직 자기 백성들만 사랑하셨다.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죄의 저주를 받으실 만큼 사랑하셨다. 그 사랑 앞에서,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육신의 욕심을 채워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씁쓸하실까.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한 단락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교회가 무시한 십자가(부크크 출판사, 김용호 씀)'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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