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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기(10)-로그로뇨~나헤라(30 km / 9일차)
Imsoonsook

 

 

 

한걸음들이 모여서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길을 나섰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중세의 건축물 사잇길을 걸으니 그 시대 어디쯤에 있는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성당의 종탑과 긴 지팡이를 든 순례객의 모습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걷는 듯 했다. 매일 저녁 잠자리가 바뀌는 일이 번거롭긴 해도 새로운 곳에서 맞는 아침은 낯설어서 좋다.


 앞서 걷던 남편이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리기를 반복한다. 방향을 잡아주던 노란 화살표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이 조급하지 않은 것은 그 길 어딘가에서 우리가 원하는 표식이 불쑥 나타나리란 믿음 때문이다. 마음의 여유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이 서서히 자리하기 시작했다. 


 아침 해가 금빛 사선을 그으며 로그로뇨 도심으로 비춰 들기 시작했다. 하루를 여는 사람들의 부산한 행렬 속을 누비며 우린 산길로 접어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포도밭 길을 종횡무진 걸었더니, 며칠째 아득하게 보였던 설산 데만다(Damanda) 산맥이 한층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전엔 15km를 무난하게 걸었다. 간간이 미숫가루와 삶은 달걀로 허기를 달래기도 하고, 길가의 간이 바(bar)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몇 개의 산간 마을을 지나 나바레테 초입에 들어섰을 즈음, 대형 와이너리 광고판에 산티아고까지 576km 남았다는 사인이 눈에 띄었다. 일주일 여 만에 230km 나 걸었다니, 한 걸음 두 걸음의 의미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 


 후반부엔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가장 큰 악재는 발바닥 물집이었고 평소보다 조금 무리하게 잡은 거리도 한몫 했지 싶다. 비틀거리며 나헤라 공립 알베르게에 들어섰다. 줄줄이 쳐진 빨랫줄에 빼곡히 널려있는 뽀송뽀송한 옷가지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막 산마루를 넘어가는 햇살의 혜택을 우리도 누릴 수 있을까, 부럽기만 했다.


 길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평택에서 온 미주네 가족과 저녁을 같이 했다. 싱싱한 채소를 곁들인 한식 밥상은 하루의 피로를 거뜬히 물러가게 했다. 

 

 

 

나헤라~산토도밍고 델 라 칼사다(21 km / 10일차)

 

 

 

 

자원봉사자들의 위로에 힘 얻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난조를 보였다. 온몸이 나른하고 몸살 기 마저 있었다. 이런 날은 앉은 자리에서 푹 쉬면 좋으련만 오전 8시엔 무조건 퇴실해야 하는 알베르게 규정상 그럴 수가 없다. 


문득 영혼을 울리는 '치킨 누들 수프' 한 그릇이 떠올라서, 라면 스프 국물에 파스타를 넣어 아침상을 차렸다. 하지만 라면 국물에 뜬 파스타가 거부감을 불러 몇 숟갈 억지로 흘려 넣고 이동 준비를 서둘렀다. 


 상큼한 봄바람을 맞으며 나헤리야 강변을 걷는다. 세월의 흔적을 안은 이끼 낀 강둑 넘어 아침 산책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평화스럽다. 자연과 적절히 조화를 이룬 인구 7, 8천의 작은 도시 나헤라는, 잠깐 스쳐가는 이방인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었다. 


기진맥진해서 들어오는 순례객들에게 시원한 레몬 물을 먼저 권하는 인심에다, 힘든 여정을 다 이해한다는 듯한 봉사자의 푸근한 미소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심한 배려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순례자가 아닌 봉사자로 돌아와 그들과 함께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꼬물거렸다. 


 오늘은 코스도 비교적 원만했고, 노란 유채꽃 길을 기분 좋게 걸었더니 컨디션도 한결 낳아진 듯 하다. 예정한 거리를 단축하여 산토 도밍고 대형 알베르게에 숙소를 정했다. 


일본에서 온 룸 메이트 노부부와 잠깐 대화한 다음, 빨래하며 점 찍어 두었던 뒤뜰로 갔다. 체리꽃이 만발한 나무아래 앉아서 발바닥 물집을 치료하는 사이, 옆에선 노 할아버지 한 분이 알베르게 50주년 기념 불꽃을 싱겁게 쏘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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