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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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들이 즐기는 백비탕
Hwanghyunsoo

 

아내가 한 달째 소화도 안되고 기운이 없다. 입맛이 없다 보니 밥 먹는 것도 힘들어하고 끼니때가 되면 먹을 게 없다고 걱정이 많다. 그래도 아침에는 뜨거운 물에 밥을 말아서 신김치나 멸치볶음, 젓갈을 곁들여 조금씩 뜬다. 이 뜨거운 맹물탕을 좀 고급지게 말하면 ‘백비탕’이라 한다.

조선말 흥선 대원군이 세도가들에 밀려 지방을 떠돌았던 때다. 후일을 같이 일 할 인재를 만나기 위해 영남 지방을 지나던 중에 상주에 있는 류심춘을 만난다. 류심춘은 시골의 선비이지만, 대원군을 만나자 예의와 당당함을 잃지 않고 심오한 학문을 바탕으로 시대를 논했고, 점심때가 되어 소반에 음식을 내놓는다. 음식이란 게 보잘것없어 김치에 멀건 된장, 간장 한 종지 그리고 보리밥이 전부였다.

양반가에서는 상에 국이나 탕을 올려야 하는데, 가난한 살림에 국을 장만할 도리가 없자 맹물을 끓여 떠놓았다. 그것이 글자 그대로 그 유명한 '백비탕(白沸湯)'이다. 대원군은 류심춘의 당당함과 인간미에 반했고, 후일 그의 아들 류후조를 중용해 정승에까지 이르게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대원군이나 류삼춘, 코비드로 일이 없는 나 또한 백수다. 하지만, 백수도 급수가 있다고 한다. 1급에 해당되는 백수를 <동백>이라 한다. 동네만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백수다. 2급에 해당하는 백수는 <가백>이다. 집에만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명 <불백>이라고도 한다. 누가 불러 줘야만 외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쌍한 백수라는 뜻으로 불백이다. 3급은 <마포불백>이다. 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다. 정말 앞이 안 보이는 백수다.

그런데 좀 나은 백수가 있다. 4급 백수인 <화백>이다. 말 그대로 화려한 백수다. 부모 덕이나, 젊었을 때 돈을 좀 챙겼기 때문에 한 주일에 두세 번 취미 활동하고 다니는 백수를 일컫는다. 그러나 그도 백수는 백수다. 이 백수들의 공통점은 별 반찬 없어도 먹을 수 있는 백비탕을 즐긴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백비탕 이야기다. 조선시대 명의, 허준은 신(神)과 같은 의원에게 비법을 전수받아 이름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욱 실력을 늘리기 위해 용한 의원을 찾아 배움을 청한다. 공부를 위해 약방은 보름 정도만 열고 보름은 닫았다. 빈 약방은 허준을 도와 약초를 써는 신참이 지키고 있었다.

나이 어린 신참 의원은 자신도 명의가 되고 싶어 했지만, 처방은 어렵고 귀동냥만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다급하게 약방문을 두드린다. 문에 출타 중이라고 붙여 놓았음에도 너무나 시끄러워서 약초를 말리고 있던 신참 의원은 문을 연다.

“급한 일이네. 의원님은 어디 계신가?” “지금 출타 중이십니다. 내일 아침에야 돌아오십니다.” “그으래? 우리 집사람이 애를 낳으려는데 난산이네 그래. 어찌 방법이 없겠나?” 사색이 된 남자를 본 신참 의원은 고민했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조선조에는 산모가 애 낳다 죽는 경우도 많았다.

“알았습니다. 저도 의학을 배우니 약을 지어 드리죠.” 큰소리는 쳤지만, 신참 주제에 약을 짓는다는 것은 어림없었다. 그래도 허준의 방에 들어가 의서를 꺼냈다. 며칠 전 산통으로 찾아온 산모를 허준이 처방했는데 갈피를 끼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백비탕이라는 글자가 들어온다.

‘으엥? 가미(*加味/본래의 약방문에 다른 약재를 더 넣는 것) 불수산(*佛手散/해산 전후에 쓰는 처방)이 아니었던가?’ 산통이 심한 산모에게 불수산을 처방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백비탕(白沸湯)이라고 하니 놀란다. 백비탕은 곽란(*식중독의 일종)이라고 부르는 급체에 좋은 약인데, 맑은 물을 여러 번 끓인 것이다. 그러나 신묘한 의술을 지닌 선생님이니 백비탕을 쓴 것으로 짐작하고 말한다.

“얼른 집에 가서 맑은 물을 끓여…” 여기까지 말하다가 ‘산모가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데 뜨거운 물 먹이라는 것이 의원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냇가에 가면 모양이 둥근 차돌을 찾아 넣어 끓이세요. 우리 선생님도 그렇게 하십니다.”

산모의 남편은 그 말에 화살이 튀어 나가듯이 뛰쳐나갔다. 신참 의원은 말은 이렇게 했는데 어쩐지 찜찜하다. 그래서 다시 의서를 펴보니 가미 불수산 편에 또 한 장의 작은 쪽지가 끼어 있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어설픈 처방으로 산모와 태아를 죽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밤새 고민하다가 아침에 산모의 집을 찾아 나서는데, 어제 왔던 남편이 커다란 굴비 한 마리를 새끼줄에 꿰어 가지고 오고 있었다. 신참 의원을 보자 남편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정말 신통한 비법이요. 차돌을 넣어 끓인 물을 먹이니 금세 출산하지 않겠소?”하며 굴비를 건네주고 돌아갔다. 허준이 돌아오자 신참 의원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미 불수산이 아니라 백비탕을 처방했는데 아기를 쑥 낳았다는 말이냐?” “네, 자갈을 넣은 백비탕입니다.” 신참의 말에 허준이 무릎을 쳤다. “맞다, 냇가의 자갈이라는 것이 흘러가는 물에 모서리가 깎인 돌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아기도 쑥 나온 것이지. 잘했다!” 이렇게 신참 의원의 엉뚱한 행동이 허준의 칭찬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백수 이야기다. 1996년에 개봉한 <정글 스토리>라는 영화가 있다. 가수 윤도현과 김창완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밴드 영화인데, 서울관객이 고작 6,621명에 그쳤다고 한다. 이 완전 망한 영화의 OST를 신해철이 불렀다. 그런데 영화는 망했는데, OST는 대박이 나서 50만장인지 팔렸다고 한다. 이 영화에 ‘백수가’라는 노래가 나온다. 1990년 중반의 백수들을 위한 노래다.

 

“방안에 앉아 혼자 불평해 봤자/물론 이 세상이 변하진 않겠지/하지만 차마 저 바깥 세상에/나 자신을 끼워 넣을 뻔뻔함이 없어/한 순간 순간마다 세상은 내게 말하지/지금 이 세상 속엔 너의 할 일은 없다고/지금 이 시간과 지금 이 공간과/지금 이 세상을 견딜 수 없어/이놈의 세상에 내가 있어야 할/내가 속해야 할 이유를 줘”

 

1996년 당시, 신해철은 세상에 대해 이것저것 잘난 체하며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백수’만큼이나 분명한 ‘개인’이 어디 있겠느냐”라며 사회적 책임을 부르짖는다. 청년 실업자들이 자신을 대변하는 가사에 호응한 듯하다. 벌써 30여 년이나 된 노래인데 아직도 청년들은 취직하기 어렵다.

아마, 신해철이 살아 있다면 “백수들이여, 뜨거운 백비탕 많이 드시고 바이러스 면역력을 높여 건강 유지하세요. 건강하면 좋은 기회가 꼭 옵니다.”라고 말해 주었을 텐데, 신해철의 잘난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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