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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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자꾸자꾸 가면, 어머니가 계시는 조국이 있다
Hwanghyunsoo

 

 지난주, 나이아가라 근처에 살고 있는 홍원표(전 MBC 관현악단) 단장과 안부 전화를 했다. “잘 계시죠?” “어휴, 너무 춥고 눈이 많이 와서 산책도 못 나가고 집에서 걷기 운동이나 하며 지내죠”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다가, “혹시 박재훈 목사를 아시나요?”하며 내가 물었다. “아, 네.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그분의 업적과 활동은 알고 있죠.” “아, 그래요. 다름 아니라 박재훈 목사님께서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분의 문화 예술적 업적과 가치를 우리 교민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워서요.”

그렇게 이야기를 끄집어 내자, 박재훈 목사가 작곡한, 어린이 동요 ‘눈’, ‘눈꽃송이’, ‘어머니 은혜’ 등 그를 추모하는 이야기가 넘쳐 났다. 그러다가 ‘기회 있으면 함께, 박재훈 목사를 기리는 문화 행사를 한번 해 보자’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동안 뵙지 못한 ‘이동렬 교수의 안부’도 묻고, 한참 수다를 떨다가 홍단장이 “황국장님, 제가 요새 곡을 하나 써 볼까 싶어서요. 좀 거창하지만, <조국 사랑> 같은 콘셉트로 구상하고 있는데, 시간 있으면 황국장이 가사를 한번 만들어 주세요.” “아, 너무 좋죠. 제 능력으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며 전화를 끊었다.

매주 칼럼을 쓰는 것도 벅찬데, <조국 사랑>이라는 숙제를 받고 어깨가 좀 무거워졌다. 아니, 어깨보다는 마음이 무거워졌다는 표현이 맞다. 내가 살면서 진지하게 조국을 사랑한 적이 있나, 싶었다. 고국에서 회사 다닐 적에도 일 년에 몇 번 있었던 사내조회마저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졌고, 딱딱한 관료 행사는 두드러기가 나는 듯해서 평생 피하며 살아왔다.

어쩔 수 없이 참석하게 되는 한인 문화 행사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면 건성으로 입만 벌렸는데 말이다. 그래도 해외에 나오면 모두 애국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위안도 해본다. 하여튼, 작사를 짓기 위해 이것저것 자료를 찾다가 안용복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된다.

안용복은 조선 후기인 1693년(숙종19)과 1696년(숙종22)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주장한 부산 출신의 어부다. 신분은 사노비였으며,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였다.

당시 부산 좌천동에는 두모포 왜관이 있었다. 왜관 근처에 살고 있던 안용복은 노비였지만, 일찍이 일본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는 동래부에 설치된 경상도 좌수영의 수군 병졸로서 전선의 노를 젓는 보직을 하다가, 제대 후 어부가 된다.

안용복은 다른 어부들과 함께 1693년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거기에서 고기잡이하러 나온 일본 어선 7척과 다툰다. "여기는 조선 땅인데, 어째서 마음대로 물고기를 잡느냐? 당장 나가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원이 적었던 안용복 일행은 오히려 그들에게 제압당해, 일본말을 할 수 있던 안용복이 대표로 오랑도(五浪島:오키섬)를 거쳐 돗토리 근처의 백기주도(伯耆州島)로 끌려간다.

당시 조선 정부는 뱃길이 험하여 울릉도를 적절히 통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것을 금지시켰지만,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 어부들은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안용복이 자기 영토를 침범했다고 벌을 주려고 데려간 것이다.

 

백기주도의 도주(島主)를 만난 안용복은 "울릉도는 조선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며 자신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도주는 안용복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고서 에도막부(江戶幕府)에 이 같은 사실을 보고했고, 막부에서는 안용복을 풀어주고 "앞으로 일본인은 더 이상 울릉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금지령까지 내린다.

당시 에도막부(江戶幕府1603~1867)는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에도(현 도쿄)에 수립한 중앙 집권적 무가 정권으로, 도쿠가와막부라고도 하는데, 사실상 일본의 집권 세력이었다.

그렇게 혐의를 벗고 돗토리에서 나가사키를 거쳐 귀국하던 안용복은 대마도(쓰시마) 족장에게 다시 감금당했고 금지령이 담긴 막부의 문건도 빼앗긴다. 50일 동안 대마도에 억류돼 있던 안용복은 동래부 왜관으로 넘겨졌고, 여기서도 40여 일간 억류돼 있어야 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왜관에서 풀려난 안용복이 동래부사를 찾아가 전말을 털어놓자, '다른 나라 국경을 범했다'며 안용복을 2년 동안 감옥에 넣어버린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조정이었다.

숙종 21년(1696년) 여름, 2년의 옥중 생활에서 풀려난 안용복은 떠돌이 중과 사공 10여 명을 모아, ‘울릉도를 수호하자’며 부산을 떠난다. 그들이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마침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일본 어부들과 싸움 끝에 몰아낸다. 안용복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 백기주도까지 쫓아간다.

 

 

이렇게 해서 백기주도에 다시 들어간 안용복은 스스로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을 자처했다. 안용복은 다시 만난 도주에게 그간의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한 다음 다시는 울릉도를 침범치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강원도 양양으로 귀국한다.

강원도 관찰사가 안용복의 보고 내용을 조정에 올렸다. 그런데 그를 기다린 것은 상이 아니라 중형이었다. 졸지에 안용복 일행은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다. 조정에서는 안용복 일행이 불필요한 국경 문제를 야기했다며 참형을 시키려 했는데, 다행히 1682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바 있는 정승 윤지완이 나서 막아준다.  

그러나 결국 안용복은 목숨만 겨우 건진 채 귀양을 가야 했고, 그 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2013년, 울릉도 북면에 <안용복 기념관>이 세워졌다. 그 기념관 입구에 ‘내 나라 내 겨레’라는 노랫말을 새긴 노래비가 서 있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피어린 항쟁의 세월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 …/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이 노래는 조영남, 송창식, 김민기, 윤지영 등이 불렀지만, 뚜렷한 주인이 없다. 1971년에 김민기가 노랫말을 쓰고 송창식이 곡을 붙여 완성했다. 김민기와 송창식이 함께 노래를 만들었다는 ‘조합’이 언 듯 그려지지 않는다. 둘 다, 20대 때의 일이다.

그렇지만, ‘통기타 치는 날라리’들이라 불렸던 이들이 만든 곡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장엄하고 깊이 있고 무겁다. 당시에 김민기, 송창식, 양희은, 윤형주, 조영남 등이 통기타 팀을 결성해 전국 대학을 돌면서 공연하기로 했는데, 기타를 치면서 떼 창을 할 수 있는 엔딩 송으로 만든 것이다.

노래 중간에 김민기의 내레이션 부분을 들으면 더욱 가슴이 뜨거워진다.

 

‘나의 조국은, 나의 조국은 저 뜨거운 모래 바람 속 메마른 땅은 아니다. 나의 조국은 찬바람 몰아치는 저 싸늘한 그곳도 아니다. 나의 조국은, 나의 조국은 지금은 말없이 흐르는 저 강물 위에 내일 찬란히 빛날 은빛 물결.’

 

이 노래를 들으면 왜, 어머니가 생각나는 걸까? 토론토에서 서쪽으로 자꾸자꾸 가면, 어머니가 계시는 조국이 있다. 어머니와 조국을 생각하면 자꾸자꾸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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