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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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라 바꿔요, 딸라 바꿔요’
Hwanghyunsoo

 

중학교 시절에 서울 신당동에 살았다. 집 근처에 동화극장, 광무극장, 성동극장 등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극단이 전국을 돌며 노래, 춤, 신파극, 만담 등을 공연했는데, 이런 쇼는 일류 극장보다는 변두리에 있는 극장에서 더 각광받았다.

당시는 극장 포스터를 가게 벽면에 붙이게 해 주면 극장 초대권을 주었는데, 동네에 부모님이 철물점을 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가 “초대권이 있으니 동화극장으로 쇼 구경하러 가자”고 해서 같이 갔다.

휘황찬란한 오색 조명, 반짝이는 화려한 의상, 귀청을 때리는 악단의 팡파르, 유명 가수와 댄서들의 아찔한 스트립쇼까지 더해져 극장의 열기는 대단했고 그런 쇼를 처음 본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가수와 가수 사이에 코미디언 같은 사람이 나와 우스개 소리를 했는데, “저 사람이 중앙시장 지나 성동공고 있잖아, 그 뒤에 살아?” 내가, “저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이야?” 했더니, “만담가야!” “… 만담이 뭐야?”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 사람이 바로 만담가 장소팔이었다. 지금은 역사 속의 인물이 되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기가 좋아 지금의 인기 연예인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만담은 조선시대 서울, 경기 지방의 잔치에서 흥을 내주던 ‘재담 소리’에서 출발한다. 소리와 춤 사이에서 흥을 돋우는 말잔치였던 재담은 신불출에 의해 독립적인 장르인 만담으로 재탄생된다.

신불출은 1905년 황해도 개성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문과를 유학했고 학자풍으로 화술과 목소리가 뛰어났다. 유명한 시를 줄줄이 외우는 등 박식하고 재주가 좋아 최초의 만담가로 등장하자마자, 대중 스타로 자리를 굳힌다.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극장에서는 그가 공연하겠다면 언제라도 무대를 제공했을 정도였다. 본래 연극배우이자 극작가로 활동하던 신불출은 풍성한 해학과 풍자를 담은 정치적 만담을 많이 했다. 해방이 되자 <조선영화 동맹>의 간부로 좌익 활동에 참여하였다가 1947년에 월북한다.

북한에서는 공훈 배우와 <북조선 문학예술 총동맹> 중앙위원을 지낸다. 하지만, 신불출은 대본을 검열하는 북한의 현실을 비판하는 등 북한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는 행동을 여러 번 하다가, 1960년대 후반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불출 이후, 만담계는 장소팔과 고춘자가 이어간다. 장소팔은 1922년 서울 인사동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은 남대문에서 모피상을 운영하고 인사동에서도 술도가를 경영하고 있었지만, 사업 확장에 실패해 변두리인 왕십리로 이사 간다.

장소팔의 초기 파트너는 10년 연하의 백금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뚱뚱해 장소팔과 결별 후, 코미디언으로 변신한다. 백금녀 다음, 콤비가 태평양 악극단 소속의 고춘자였다. 평안북도 운산 출신인 그녀는 장소팔보다 한 살 아래로 원래 가수 지망생이었는데, 장소팔과 함께 활동하며 만담가로 인기를 얻는다.

두 사람은 1950년대 위문 공연 때 만나 단짝이 된다. 어수룩하면서도 엉뚱한 장소팔과 서글서글한 눈매에 쉰 목소리를 지닌 고춘자의 말재간은 전쟁 이후 지쳐 있는 대중들의 시름을 잊게 해주었다.

 

 

그들은 따발총 같은 속도로 만담을 했다. “춘자야.” “네, 아버지.” “비가 몇 도냐?” “끓는 물은 백도인데 글쎄요, 비는 몇 도예요?” “비가 몇 도냐 하면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유행가에 들어있어. 비가 오~도다.”

이어서, “그나저나 왜 이름이 장소팔이에요?” “아버지가 장에 소 팔러 간 사이에 낳았다고 장소팔이라오.” “어머나, 그러면 가족들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형님은 중팔이, 아버지는 대팔이, 우리 할아버지는 곰배팔이라오.”

또 다른 걸작, ‘딸라 부인’이다. “아휴, 저의 집은 딸이 일곱이라 고민이에요” “아이고 무슨 고민을 하나 그랬지. 내가 그 딸들을 아들로 바꿔주는 데를 잘 알아” “딸을 아들로 바꿔 주는 데가 있어요?” “그럼, 내가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웬 부인들이 ‘딸라 바꿔요, 딸라 바꿔요’라고 속삭이지 않겠어?” 사회 풍자가 살짝 섞인 그의 능청스러운 만담은 배꼽을 잡게 했다.

초기 만담 시대인 1950부터 60년대에는 만담 사이에 민요를 곁들이는 것이 유행하다가 라디오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이야기로만 하는 ‘라디오 만담’이 유행한다. 1970년 TV 시대에 들어서며 새로운 코미디 장르가 생겨 난다. TBC의 ‘살짜기 웃어예’, MBC ’웃으면 복이 와요’와 TBC ‘고전 유머극장’ 등에서 젊고 새로운 형식의 콩트를 선보이며 개그 시대가 열리며 만담은 차츰 설 자리를 잃는다.

 

 

 

본격적인 칼라 TV 시대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담은 ‘개그의 아버지’로 일선에서 밀려난다. KBS ‘유머 1번지’와 ‘쇼 비디오자키’ MBC ‘청춘 만만세’와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폭발적으로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배삼룡, 이주일, 백남봉, 임희춘, 심철호 등 선배 코미디언들과 함께 전유성, 고영수, 임하룡, 엄용수, 김보화, 이성미, 최양락, 심형래, 김형곤 등 많은 새롭고 젊은 개그맨들이 등장한다.

추석이나 설 특집에서나마 볼 수 있었던 만담 코너는 고춘자가 1995년, 장소팔이 2002년에 세상을 떠나며 아예 TV에서 사라진다. 지금은 <만담 보존회>와 몇 명 개그맨들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지만, 생존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 만담이 서민들에게서 멀어졌는가? 현재, <만담 보존회> 회장으로 있는 장소팔의 아들 장광팔은 “만담을 해오면서 스스로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바로 국악이 빠진 채 만담만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예전처럼 만담과 민요와 국악이 어우러져야 ‘제 맛 나는 만담‘이 완성된다고 한다. “국악과 다시 결합하여 젊은 층이 선호하는 스토리로 만들어져야 만담이 생존하고 발전하는 길이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한다.

단지, 만담뿐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전통과 문화가 하나, 둘 함께 사라져 간다. 그나마 볼 수 있었던 이은관의 배뱅이 굿이나 김세레나의 신민요, 김뻑국의 해악 타령 등 우리 민족의 서민 문화를 붙잡고 있었던 기틀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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