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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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굴레산과 장군별장 사이의 ‘보리밭’
Hwanghyunsoo

 

 어느 목회자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어요?”라는 글을 보며, 나의 지난 모습을 되돌아본다. 행복했던 순간이라… 언제였지? 잘 생각나질 않는다. 학교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지금까지 숨 바쁘게 살았다. 아내와 결혼한 후 자식들이 생기며 책임은 더 늘어났고 그만큼 은행대출금도 많아졌다. 간부 사원이 되고부터는 경제적으로 좀 여유로워졌지만, 미래에 대한 위기감은 더 느껴졌다. 과감하게 회사를 접고 캐나다로 이민을 왔지만, ‘아, 내가 무모했구나’ 하며 곧 후회를 했다.

 이민생활은 즐거웠던 일도, 힘들었던 일도 제대로 느낄 여유가 없었다. 내가 쓰러지면 우리 가족들도 함께 불행해질 것같아, 그런 생각조차 사치였다. 은퇴한 후에는 무기력과 섭섭한 감정이 찾아왔지만, 새로운 취미 생활을 하다 보니 나름 의욕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연금받아 생활하며 ‘지금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라고 말하기는 좀 부끄럽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하니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추자도의 해군생활이다. 나는 그곳에서 14개월을 복무했다. 요즘 추자도는 낚시와 올레길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1977년만 하더라도 관광객들이 왕래하기에는 무척 불편한 곳이었다. 이 섬은 완도와 제주 사이에 있는데, 당시는 주민 3천여 명이 살았다. 목포에서 5시간, 제주에서 3시간이나 걸렸고 파도가 심해지면 섬에서 3~4일은 나가지 못하고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곳에 근무하면서는 추자도가 그렇게 좋은 곳인지 못느꼈다. 내가 근무한 부대는 목포 3해역사 소속 <202 레이다 사이트> 기지였다. 부대 전 인원이 30여 명이었는데, 하사관과 장교가 15여 명이고 수병이 15여 명 정도였다. 내가 부임했을 때는 내 위로 선임수병 1명, 동기 1명, 그리고 후임들이었다. 그러다보니 내무반 생활도 편했고 과업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인원이 작은 곳이어서 가족같은 분위기였고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부식을 섬에서 자급자족해야 했다. 찬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과업이었는데 고등어가 한창일 때는 싱싱한 회부터 국, 조림, 구이, 튀김뿐만 아니라 김치에다 고등어를 넣어 담아먹기도 하였다.

 추자 어선들이 일손이 부족할 때는 부대원들이 대민봉사로 작업을 도와주곤 했는데, 돌아올 때면 감사의 뜻으로 막걸리와 푸짐한 안주거리를 가지고 왔다. 요즘 최고의 안주거리인 쥐포를 심심풀이로 즐겼다. 마을에서 얻어온 생선을 말리기 위해 당번도 있었다. 발전실은 일년 내내 온도가 높아 생선건조에 최적인 장소였지만, 냄새 때문에 파리가 꼬여 우리들은 돌아가며 파리채를 들고 생선을 지켰다. 싱싱한 홍합, 미역과 다시마, 돌김을 직접 따서 먹는 것은 아무나 누리지 못할 호사였다.
 


 내가 하는 주 업무는 부대입구를 지키는 위병업무와 산꼭대기에 있는 벙커에서 레이더를 보는 일이었다. 우리 기지는 상추자도 영흥면 ‘큰산’ 중턱에 있었는데, 위병을 서다 보면 추자항과 맞은편 봉굴레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추자항은 규모는 작지만, 해안을 따라 음푹 들어간 지형조건으로 항구가 발달해 추자도의 중심 노릇을 하고 있다. 각종 행정기관인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이 있고 초등학교 그리고 여러 생활편의시설도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위병이라고는 하지만, 영외 거주자들이 퇴근하고 나면 사실상 부대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없기에 먼 산을 바라보거나 항구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망원경으로 구경하는 일이 일과였다. 그 좋은 풍광을 바라보며 그리운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곤 하였는데, 평생 편지의 7할은 이곳에서 썼지 싶다.

 우리 부대의 주소는 ‘제주도 북제주군 영흥리 장군별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 편지를 받아본 친구들은 ‘장군별장’에서 근무하니 얼마나 좋냐?’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군별장’은 통신보안을 위한 거짓 주소였다. 마주 보이는 봉굴레산은 높이가 60미터 밖에 안 되는 야산이었고 당시는 나무들이 없어서 산마루 전체가 훤히 들여다 보여, 몰래 집나온 강아지 조차도 보일 정도였다.

 봉굴레산은 여인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북서쪽 머리 부분에 다무래미라는 섬이 있고, 산 정상은 젖가슴처럼 두 개의 봉우리로 나눠져 있다. 제주말로 ‘봉끄랑하다’는 ‘무언가 풍성하고 빵빵하다’는 뜻인데, 아마 그 말이 변해 ‘봉굴레’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부대가 있는 ‘큰산’(산 이름이 큰산이다)과 ‘봉굴레산’ 사이에는 밭들이 펼쳐 있었다. 배추, 상추, 고추 등을 키웠고 여름에는 고구마를 심었다. 고구마가 제철일 때는 밤에 야간조를 짜서 고구마를 서리를 해서 삶아 먹기도 하였다. 한 번은 부대 앞 고구마 밭주인이 화가 치밀어 부대에 올라와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밭 한 고랑을 다 뒤집어 파가는 건 너무 하는거 아니냐”며 핏대를 올렸다. 영외 거주자들은 대부분 추자 사람 집에 세들어 살거나 현지여성과 결혼을 한 선임하사도 있었기에 그 농부의 말을 무시할 수가 있나? 우리들은 일단 시치미를 뗐지만 그가 밭에서 찾아 가져온 숟가락이 결정적 단서가 됐다. 그 숟가락에는 별표 모양의 표시가 있었는데, 그것은 군에서 사용하는 숟가락이었다. 지난밤 서리 때 누군가 숟가락으로 땅을 파다가 잊어버리고 온 것이다. 그것을 본 기지장은 부식창고에서 쌀 한 가마니를 꺼내 농부의 집으로 보내 주었고, “다음 농사 때 대민봉사를 하겠다”고 약속해 말썽없이 마무리됐다.
 


 고구마를 걷어낸 그 밭에는 11월 중순경부터 보리 파종을 한다. 다음해 4월경에는 푸른 청보리가 온 밭을 뒤덮는다. 항구로 밀려오는 흰 파도만 보아도 가슴이 벅찬데, 거친 바람이 청보리를 춤추게 하면 그 모습은 황홀하다. 바다와 바람의 위대한 조화가 시작되면 이 노래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가곡 ‘보리밭’은 시인 박화목이 그렸고, 윤용하가 곡을 입혔다. 황해도 은율 출신인 둘은 1951년 부산에서 만나 “아무리 피난살이지만 보람있는 일을 하자”며 이 가곡을 만든다. 이 노래는 서정적인 멜로디이지만 낭만적이고 사람의 마음을 격정으로 몰아가는 힘이 있다. 윤용하는 외로운 작곡가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모를 따라 만주 봉천에서 자란다. 어릴 때 프랑스 신부의 성당에서 노래하고 성가대를 지휘하면서 음악을 배운다. 용정과 함흥 영생여중 교사를 지냈다가 해방 후 남하하여 한양공고와 동북고교에서 음악 교사하며 “낮에 놀다 두고 온…”이라는 동요 ‘나뭇잎 배’를 작곡한다. 하지만, 외로움과 가난에 지친 그는 외로이 단칸방에서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박화목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만주로 건너가 봉천신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후 남으로 내려와 서울에 정착한 그는 중앙방송국(KBS)의 프로듀서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보리밭’은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였다. 같은 실향민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감상에 젖는 것은 그런 마음이 통해서이다.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성품으로 아이들을 위한 동요를 여러 곡 만드는데 ‘과수원길’도 그의 작품이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나는 가곡 ‘보리밭’을 들으면 추자도 ‘봉굴레산’과 ‘장군별장’ 사이에 펼쳐진 보리밭이 생각난다. 그 보리밭은 관능을 자극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섬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삭이 팬 보릿대를 꺾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서리했던 고구마 밭주인이 그 보리밭의 주인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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