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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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마음, 뜻을 녹인 ‘말모이’
Hwanghyunsoo

 

 캐나다에 살면서 가장 불편한 점을 꼽으라면 무엇을 꼽아야 할까? ‘말’이지 싶다. 이곳에 오랫동안 살아 원어민과 편하게 대화를 하는 사람들도 종종 소통이 안되어 헤매는 경우가 있다. 한 달 전, 다리에 찰과상을 심하게 입어 응급실에 갔다. 어떤 교민이 ‘응급실에 혼자 갔다가 말이 안 통해서 혼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의사가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아들이 없었으면 진땀깨나 흘렸을 뻔했다.

그런데 의사가 ‘무슨 주사를 맞은 적이 있냐?’고 묻는데 아들이 나에게 통역을 제대로 못한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빠, 쒜덕 주사 맞은 적 있어?” “뭐…?” 내가 못 알아들으니 다시 “쒜덕, 쒜덕 주사”한다. “그게 무슨 주사지?” 답답한 아들이 다시 셀폰으로 뭔가를 찾아보더니, “파상풍 주사!”해서 “아, 파상풍… 맞은 적 있지” 우리 둘 사이에서 번갈아 보고 있던 의사가 그제야 웃는다.

참, 아들과도 이렇게 말이 안 통하니… 아들은 파상풍 주사가 생각나지 않자, ‘쇠독 주사’로 통역했고 나는 ‘쒜덕 주사’로 들은 것이다. 옆에 있던 캐네디언 간호사가 웃으며 “안농~허세요?”하며 아는 체를 한다. 이제는 한국말로 인사하는 캐네디언이 꽤 있다.

 이렇게 말이 안 통해 불편한 점도 있지만, 남들이 못하는 모국어 때문에 자랑스러울 때도 있다. 이곳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지만, 자기 모국의 말과 글에 자부심을 가지는 민족이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한국어로 제작된 영화, 케이 팝, 드라마, 문학 등이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고, 모국의 국력이 커지면서 한글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모국어에 관심이 없었던 한인 2세뿐만 아니라, 타민족들도 한국 영화, 드라마, 케이 팝을 들으며 한국어를 배우려 한다.

몇 해 전 언론에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세계 각국의 언어를 분석한 결과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을 기준으로 선정한 문자 순위에서 한글이 1위를 차지했다. 일본인으로 <한글의 탄생>을 쓴 디자인 연구가 노마 히데끼 (野間秀樹)는 한글 지형의 과학적 조형성을 극찬하면서 한글은 ‘세계 문자 역사의 기적’이고 세계적인 보물이다.”는 기사가 났었다.

또한 신승일 한류 전략연구 소장은 “한글은 컴퓨터나 휴대전화 문자 입력에서 한자나 일본어보다 7배 가량 빨라 중국과 일본에 대한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일조한다. 문자 입력 속도는 정보 검색과 전송 속도를 결정하며, 이 속도는 지식 정보와 시대의 개인과 기업, 나아가 국가 경쟁력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라며 한글의 우수함을 알리고 있다.

1970년대 우리를 놀라게 한 미국의 흑인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는 낱말 세 개로 7대에 걸친 200년간의 자기 조국과 조상을 찾는, 대 추적의 드라마였다. 200년 전 노예상들에게 팔려서 미국으로 이주한 아프리카 흑인들이 어떻게 자기의 조상이 아프리카 서해안의 ‘감비아’라는 나라에 있는 ‘만딩 가족’이라는 것을 알아내었을까? 여기에는 ‘킨데’라는 만딩가 부족의 성씨와, ‘캄비볼롱고’라는 강 이름과 ‘코’라는 악기 이름이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그들의 말 세 마디가 남아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영영 조국과 조상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말과 얼, 겨레는 서로 엉켜 있다.

2019년, 토론토에도 상영된 영화 <말모이>의 한 장면이다. 경성역에 내린 유정환(윤계상 역)에게 부딪힌 아이가 죄송하다며 말한다. "스미마셍." 정환이 "너는 조선인인데 미안하다고 해야지, 스미마셍이 뭐냐?"고 묻자, 아이는 조선말을 모른다며 가버린다. 일본어 상용 정책이 시행되면서 학교에서도 조선말을 가르치지 못하고, 우리 땅에서 우리말이 사라져 가던 시기, 일제 강점기 조선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들이 공기나 물처럼 무심히 쓰고 있는 한글이지만, 이름조차 일본식으로 바꿔야 했던 일제 통치 기간 동안, 우리말은 과연 누가 어떻게 지켰을까? 영화 <말모이>는 그 의문에서 시작된다. 일제 강점기, 우리말을 지켜낸 애국지사들의 사전 편찬기를 다루고 있다. ‘말을 모은다’는 의미의 ‘말모이’는 영화의 제목인 동시에, 주시경이 만든 최초의 국어사전 원고를 일컫는 말로, 사전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주인공 김판수(유해진 역)는 소위 말하는 ‘까막눈’에, 생계 때문에 도둑질을 하지만, 자식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가장이다. 전과 경력이 들통나 허드레 거리를 맡아 일하던 극장에서 해고를 당하자, 판수는 아들의 학비 마련을 위해 소매치기를 하게 된다. 이때 <조선어학회> 회장인 류정환의 가방을 노리다가 조선어학회와 인연을 맺게 된다.

 

 

<조선어학회>에서 심부름을 하던 판수는 조금씩 <조선어학회>의 열정에 감화되며, 한글을 배우고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언어의 중요성을 느낀 판수는 적극적으로 조선어 사전 편찬에 동참한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전 편찬을 이어 나가던 <조선어학회>는, ‘치안유지법 1조 내란죄’라는 명목으로 검거 당해 온갖 고초를 겪는다. 판수는 아들의 걱정 어린 만류에 활동을 그만두려고 고민하기도 하나, 한글 사전 원고를 지키기로 선택했고 결국 목숨을 잃는다. 해방 후, 판수가 감춘 한글 원고가 발견되고 ‘조선말 큰 사전’이 발간된다.

‘말을 모으다, 마음을 모으다, 뜻을 모으다’. 이 세 가지가 <말모이>의 핵심 키워드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분노하며, 그려내는 장면들은 단순히 한글을 보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글에 담겨 있는 민족정신과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한글은 누군가의 희생과 투쟁 하에 지켜졌던 것이다.

<말모이>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에 거의 온전한 자기 말을 지킨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