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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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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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경자년 끝자락에 친구가 연하장을 보내왔다. 같은 선생한테 배웠는데, 그는 이렇게 훌륭한 그림도 그리고 좋은 시도 잘 찾는다. 이 친구를 볼 때마다 나의 등록금 중 일부는 홍태규의 재능을 위해 보태 준 것인가 싶다. 나도 직장 안 다니고 그림만 그렸다면 이 정도는 했을 텐데 하는 핑계를 대보지만, 그도 가족 먹여 살리려고 간판장이 하며 살았기에 할 말이 없다. 그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붓을 놓지 않은 덕이다.

 

▲홍태규의 <세월>. 화선지에 동양화 물감(2020.12)

 

묵은 해니 새 해니 분별하지 말게나/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세월>이라고 하는 학명선사(鶴鳴禪師)의 시다. 학명선사는 단풍으로 유명한 정읍 내장사에 오래 머물렀던 고승이다. 성은 백(白)씨로 1867년에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마을의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열여섯 살쯤에 가세가 점차로 기울어 붓 만드는 기술을 익혀 생계를 이어 갔다. 스무 살 되던 해에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문득 삶의 덧없음을 깨닫고 나그네 길에 오른다. 그의 발길은 순창 구암사에 닿았고, 당대의 고승 설두화상의 지도 아래 불도를 닦기 시작한다.

 

이후 불갑사에서 출가하고 4년 뒤에 구암사에서 구족계를 받는다. 구족계는 출가한 사람이 정식 승려가 될 때 받는 계율이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지리산 벽송사, 조계산의 선암사, 송광사 등지를 두루 찾아다니며 천하의 선지식을 참방하여 학문을 두루 통달하였다.

 

학명선사는 부안 내소사와 변산 월명암의 주지를 번갈아 맡았다. 나이 마흔두 살이 되는 1914년 봄에 중국과 일본의 이름난 사찰을 두루 돌면서 이름난 선승을 만나 서로 같고 다른 것을 비교하였다. 그때 학명선사가 일본 임제종의 석종연선사와 나눈 선문답이 아사히 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조선 승려의 기개를 알리는 일화로 유명하다.

 

석종연이 학명에게 묻기를, “그대 이름이 정녕 학명(학의 울음) 일진데, 어디 한번 학 울음소리를 내보라!”고 했다. 그에 학명이, “늙은 소나무 가지가 굽 돌고 옹이가 많아서 발 붙일 데가 없나이다.“ 라고 화답했다. 이에 석종연은 무릎을 치면서, “이는 조선 고불(古佛)이로다!”라고 찬탄하며 부처님 뵙는 예를 표했다고 한다.

 

1923년에 내장사의 주지가 된다. 당시 내장사는 절의 운영 부실로 인하여 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다. 그는 제자들과 직접 절의 건물들을 보수하고 오래된 길을 닦고, 사찰 주위에 있던 이름난 중의 유골들을 한 곳으로 모아 부도전을 만든다.

 

학명은 승려가 ‘놀고만 먹어서는 안 된다’는 반선반농(半禪半農)의 사상을 가르쳐 손수 농사를 지어 보아 그 고통까지도 체험하였다. 그리고 내장사 주변의 넓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작물과 수목을 심고 가꾼다. 아침에는 경전을 읽고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좌선을 함으로써, 스스로 참선하고 수행했다. 이 규칙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학명선사는 승려들이 신도들의 시주에 의지하여 편하게 먹고 자는 것을 경계하였다.

 

▲학명선사는 1923년에 정읍 내장사 주지가 되어 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다.

 

학명은 자기가 죽는 날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돌아가신 날 아침의 일이다. 그는 제자를 시켜 “오늘이 마침 정읍 장날이군. 얼른 정읍 시장에 나가서 무명베 4필, 짚신 10켤레, 그 외 상례에 필요한 물품을 알아서 사 오도록 하게. 지금 당장 떠나게.” 하는 것이었다.

 

제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스승의 부탁이므로 시행은 해야 했지만, 마침 비가 죽죽 내리고 있어 그리 급한 일도 아니라 다음 장날이나 가려고 하고 있는데 학명의 독촉이 또 있었다. “아니, 얼른 떠나질 않고 무얼 하고 있나? 지체 말고 시장을 다녀오게.” 하는 것이다.

 

제자가 장을 보러 떠난 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학명은 먹을 갈아 달마상을 그렸다. 6장의 그림을 다 그린 학명선사는 자리에 몸을 눕혀 미소를 지으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1929년 3월 27일 오후 2시였다. 정읍장에 다녀온 제자는 사 온 상례를 그대로 쓸 수 있었으니 학명의 영감에 탄복하였다.

 

 새해를 맞아 학명선사의 <세월>을 보니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새해 결심은 왜 그토록 지켜지지 못하는가'를 연구한 과학자들이 있다. 논문에 따르면 77% 사람이 새해 결심을 일주일 정도 지킨다. 그리고 대부분은 포기하고 19%는 나름 지키며 2년 정도를 보낸다고 한다.

 

나도 새해마다 새로운 결심을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새로 뭔가 하고 싶으면 결국엔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 새로 고침이 힘든 이유는 그래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새해 결심이 어려운 것은 내년에도 새해가 온다는 거다.

 

새로 고침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삶에서 새해가 더 이상 없어지는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 명학선사의 시에서 답을 찾는다면 ‘그날이 그날인데 해가 바뀌었다고 그리 유난 떨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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