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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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상처’만 남긴 <김치즈>
Hwanghyunsoo

 

토론토로 이민 와 4년쯤 됐을 때, <마인즈 프로덕션>이라는 공연 매니지먼트 회사를 차렸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온타리오한인실업인협회(OKBA)에서 연락이 왔다. “내년 봄에 ‘OKBA 여성의 밤’을 하는데 기획서를 내보라”는 것이다. 그동안 전영록, 오재미, 박미선, 이성미, 선우용녀, 혜민, 유양일 등이 출연했는데 ‘뭔가 변화를 주고 싶다’는 취지였다.

 

 ‘OKBA 여성의 밤’은 당시 캐나다 한인행사로는 가장 크고 버라이어티 한 공연이었다. ‘그동안 초청 가수들이 알아서 공연을 하다 보니, 체계적이지도 않고 음향이나 조명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행사를 망친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메인 가수는 이광조로 하고, 전체 콘셉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00곡’을 선정해 그 중 대표 곡을 연대별로 소개하겠다고 기획서를 냈다. 몇 회사를 지정한 멀티 경쟁이었는데, <마인즈 프로덕션>이 선정돼 한국에 가서 이광조와 전문 MC 권영대를 섭외하였다. 또한 고국 지인에게 ‘노래 100선’ 중 대표 곡 12곡의 영상 자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토론토에서 첫 작품이니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아 모든 음원은 CD나 테이프로 받아야 했는데, 우여곡절 속에 만들어진 이 영상에 맞춰 노래할 가수가 없었다. 공연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 4~5명의 가수가 필요했는데, 예산 관계로 더 이상 가수를 섭외할 수도 없어서 이 참에 토론토에서 신인 그룹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노래 잘한다는 대학생 남녀와 당시 고등학생 한 명을 섭외해 팀을 만들었다. 이들을 지도할 보컬 선생도 찾고, 일주일에 두 번씩 집 지하에 공간을 만들어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몇 주 뒤에 “자기 딸도 그 연습생에 끼워달라”는 어느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다. 그 딸은 고등학교를 바로 졸업한 친구였는데, 노래 솜씨는 그저 그랬지만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고 장래 희망이 뮤지컬 가수라고 해서 팀에 합류시켰다.

 

 공연이 한 달 정도 남았을 때,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나중에 팀에 합류한 친구가 잘 어울리지를 못했다. 나름 그들 만의 세계 속에 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눈치챘지만, 무슨 소속사도 아니고 내가 간여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 멤버 중에 유학생이 있었는데, 토론토한국일보에서 팀 소개 기사를 쓰며 사진도 게재하는 등 비중 있게 다뤄 주었다.

 

그런데 그 기사를 보고 토론토에 살고 있는 유학생 엄마의 친구가, 기쁜 마음으로 “네 아들이 여기 토론토에서 가수 되었다”고 친구에게 축하 전화를 건 것이다. 그 엄마는 전화를 끊자마자 화가 나서 아들에게 “공부하라고 보냈더니, 무슨 짓이냐. 당장 때려치우지 않으면, 학비는 물론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 뒤, 그 유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 다른 문제는 팀 이름이었다. 나는 어차피 토론토에서 활동하는 팀이니, 한국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김치즈>라고 정하려고 했다. 김치와 치즈의 합성어다. 우리 모두 사진 찍을 때, ‘김치’ 또는 ‘치즈’ 하지 않는가? 잘 알려진 단어이니 홍보하기도 쉽고…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촌스러운데, 그 당시는 왠지 그러고 싶었다.

 

멤버들에게 팀 이름을 알린 그날 저녁, 뮤지컬 가수 지망생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딸이 그러는데, 팀 이름이 <김치즈>가 맞냐?”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우리 딸은 팀에서 빠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촌스러운 이름으로 활동하지 못하겠다”며 전화를 끊는다. 팀원들과의 사이도 좋지 않고, 핑계 김에 그만 두려는 속셈이었다. 그래서 <김치즈>라는 이름은 사용하지도 못하고 ‘검은 상처’만 남기고 묻혀 버린다.

 

팀 이름 이야기를 하려다가 앞 글이 길어졌는데, 그 난리 이후 급조된 새로운 멤버들로 ‘2007년 OKBA 여성의 밤’은 어렵사리 공연을 마쳤다. 지난 이야기지만, 나도 <김치즈>란 이름이 어떻게 떠올랐을까 싶다. 하지만, 아이디어란 결국 듣고 알고 있는 경험이나 기억 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1950년대에는 오디오 녹음 기술이 열악해 라디오 방송을 하려면 가수들이 직접 출연해 생방송으로 노래해야 했다.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그래서 1956년에 방송을 손쉽게 할 수 있도록 KBS(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직접 10인치 LP 판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아는 12인치 레코드판은 어떤 가수가 최초로 녹음했을까? 그 주인공은 여성 듀엣 <김치켓(Kimchi Kats)>이다.

 

1960년 미 8군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작곡가 박춘석에 의해 발굴돼 외국 팝송이었던 `검은 상처의 부루스`를 불러 대박을 친다. 친자매는 아니지만 리더 격인 김양수는 부산 사범대학 출신이고, 김영기는 이화여대를 중퇴한 서울 출신이다. 듀엣은 한국 가요계의 정상을 찍고 해외로 눈을 돌려 일본으로 가 도쿄, 오사카 등을 순회하면서 교포 위문을 해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다.

 

그 뒤 1년 동안 일본, 홍콩, 필리핀, 대만을 거쳐 귀국한 <김치켓>은 다음 해인 1964년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로 가서 둥지를 튼다. 당시 라스베이거스 최고의 무대였던 스타더스트 호텔을 주 무대로 활동했던 이들은 '동양에서 온 매혹적인 스타일의 여성 그룹'으로 호평을 받았다.

 

▲한국 최초의 12인지 레코드판인 <김치켓>의 ‘검은 상처의 부르스’

 

해외 진출을 앞두고 발표했던 <김치켓>의 1962년 독집 음반 '검은 상처의 부루스'는 한국 대중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음반이다. 총 12곡이 수록된 이 앨범의 가치는 한국 최초의 12인치 LP 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명반의 가치가 있다. 지금은 구름이 흘러가듯 추억 속에 묻혀버린 노래지만 아직도 멜로디가 선하다.

 

“그대 나를 버리고 어느 님의 품에 갔나/가슴에 상처 잊을 없네/사라진 아름다운 사랑의 그림자/정열의 장미 사랑도 검은 상처의 아픔도/ 맘속 깊이 슬픔 남겨 놓은/그대여 밤도 나는 목메어 우네”

 

이 명품 음반이 어렸을 적에 우리 집에 있었다. 아마, 독수리표 전축을 샀을 때 끼어 팔기로 따라온 것 같다. 당시는 레코드판이 몇 장 없으니 이 <김치캣> 판을 밤낮으로 들었다. 그런 <김치켓>의 씨앗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가 이 훗날 토론토에서 <김치즈>로 싹을 틔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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