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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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Hwanghyunsoo

 

 1970년대, 젊은이들은 막걸리 집에서 군가를 많이 불렀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누군가 “사~나이로 태어나 할 일도 많다만…”하며 ‘진짜 사나이’를 흥겹게 시작하면, 옆의 친구도 따라 부른다. 막걸리 집 아줌마가 달려와 “아직 10시도 안됐는데, 이러면 다른 손님에게 방해된다.”라고 뭐라고 그런다. 이 모습을 보던 옆 자리에서 “괜찮아요! 아줌마, 우리도 부르면 돼요.” 하며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 편지를 쓰고요…”하며 ‘해병대 곤조가’를 부른다.

 

이에 뒤질세라 다른 자리에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이쯤 되면 술집은 군가 경연장(?)이 된다. 그 당시 젊은이들이 자주 가는 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젊은이들에게 군가가 특히 인기 있었던 이유는 멜로디가 빠르고 경쾌하며, 젓가락으로 장단 맞추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군대를 갔다 온 이들은 고된 훈련 속에서 배운 군가를 잊을 수가 없고, 군을 다녀온 자부심도 한몫 하여 목이 쉬도록 군가를 불러댔다.

 

1970년대에는 가수들의 음반에 건전 가요나 군가가 1곡 이상 들어 가야 음반 심의에 통과하던 시절이라, 군대와 관계없는 여성들도 웬만한 군가는 따라 불렀다.

 

▲군대에서 불렀던 군가는 40여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해군 UDT 대원들이 군가를 부르며 구보를 하고 있다.

 

 1960년대의 술자리에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노래들이 사랑 받았다.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를 시작하여 낙동강, 추풍령, 삼팔선이 차례로 등장하는 ‘전우야 잘 자라’는 진중가요다. 전쟁으로 부모 형제 전우를 잃은 사람부터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의 가슴까지 울렸던 이 노래는 막걸리에 잘 어울린다.

 

작곡가 박시춘이 곡을 만들고 유호가 작사를 했다. 둘은 전쟁을 소재로 한 곡을 많이 남겼는데, 1.4 후퇴를 배경으로 한 ‘전선야곡’, 피난이 끝나 서울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이 그들의 작품이다.

 

유호는 서민들의 애환을 잘 그려낸 드라마 작가로 유명한데, 대한민국 최고의 군가라 부를 만한 ‘진짜 사나이’도 그의 작품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로 시작하는 낭송문 ‘국기에 대한 경례’는 작곡가 이교숙이 1956년에 만들었는데, 1965년부터 정부의 공식 경례곡으로 채택된다. 초등학교 조회부터 직장, 군대, 정부 행사 등에서 애국가 전에 울려 퍼지는 이 곡은 행진곡 같은 데서 따온 것일 거라고 무심코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곡은 고 이교숙의 작곡이었고, 그의 유족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포함한 92곡에 대한 저작권을 지난 9월 4일 국가에 무상 기증했다.

 

이교숙은 가수 신중현 등에게 화성법을 가르친 1세대 현대 음악 연구자로, 제6대 해군 군악대장을 지냈다. ‘해군가’를 작곡하기도 한 그는 토론토에 살고 있는 이맥의 아버지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각종 기념식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이 음악을 사용할 경우 저작권료가 발생했지만, 이제부터는 무료로 누구나 내려 받을 수 있게 됐다.



▲1976년부터 시작된 국기 하강식 장면이다. 오후 6시(동절기엔 5시) 애국가와 함께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면 국민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육군에 ‘진짜 사나이’가 있다면, 해병대에는 ‘해병대 곤조가’가 있다. 이 노래는 병사들 사이에서 만들어져 불려 오고 있는 구전 군가다.

 

 “우리 마누라 키가 작아 키가 작아/ 싹싹하기는 그만인데/ 부엉이 눈깔을 뜰 때면/ 자동차 헤드 라이트 못 당해 못 당해/ 예스 오케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예스 오케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군생활의 애환을 담고 있는 이 노래는 그리움, 성적 욕망, 자부심 등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가사가 다소 민망한 부분도 있지만, 점잖은 자리에선 가사를 대충 얼버무리는 기교(?)로 듣는 이들을 즐겁게 했다.

 

군가는 아니었지만, ‘인천의 성냥 공장 아가씨’가 있다. 코미디언 남보원이 잘 불렀던 이 노래는 “성냥 공장 아가씨가 성냥을 치마 속에 감추고 나온다”는 외설적인 내용이어서, 한참 성(性)에 예민한 젊은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노래였다. 하지만, 노랫말에 숨어있는 당시의 상황은 다소 슬프기까지 하다.

 

1917년 인천부 금촌리(인천시 동구 금촌동)에 일본인이 <조선 성냥>이라는 공장을 세우는데, 성냥의 독점화 때문에 한국인들은 기술도 못 배우게 했고, 성냥 1갑에 쌀 1되라는 비싼 값에 판매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수공업 형태의 <대한 성냥>이 생기며 인천은 ‘성냥 공장의 원조’로 자리한다.

 

1960년대 만해도 성냥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생필품이었고, 가격도 비쌌다. 공장을 다니던 10대 소녀들은 대개, 가난한 부모와 힘들게 공부하는 동생들의 학비를 위해 먹을 것을 아끼고, 입을 것을 절약하며 일하는 시골 출신들이었다. 그러다 명절 때, 고향 갈 생각을 하며 시골집에서 필요한 귀한 성냥을 가져다 주고 싶은 마음에 성냥을 치마 속에 몰래 감추고 나오는 모습에 눈물겨운 애틋함마저 배어 있다.

 

 성냥이 귀했던 시절을 보낸 이들에겐 군가는 언제나 추억을 다시 만드는 에너지다. 요즘도 그 시절에 불렀던 군가를 흥얼거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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