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180 전체: 273,776 )
공천야록
Hwanghyunsoo

 

  가뜩이나 ‘코로나19’ 때문에 답답한데 고국의 국회의원 공천 파동은 해외 동포들의 마음까지 편치 못하게 하고 있다. 조선 말기에 옛 야사를 모아 만든 <매천야록>에도 벼슬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한 기록이 있다.


구한 말 학자인 매천 황현(1864~1910)의 글을 모아 만든 이 책은 정식 사서가 아니기 때문에 도도하고 차가운 느낌의 문장이 많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잘못이나 하늘 같은 상감 마마의 행적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고, 당시에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청나라나 일본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하는 등 합리적 견해를 엿볼 수 있다. 


다만 이 책은 개인의 기록이며 사건들을 객관적 교차 검증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볼 수는 없다. 또한 이 책은 본인이 발표한 것이 아니고 황현이 죽은 뒤, 주변 사람들이 과거 문집을 편찬해서 나온 책이다. 표현이 거친 것도 그 영향으로, 황현의 글은 주위에서 들은 정보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지금의 카톡이나 개인 블로그를 옮겨 쓴 것과 비슷한 것이다. 


 

▲<매천야록>은 구한 말의 학자인 황현(1864~1910)의 글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비교적 합리적으로 신랄히 비판하기도 했고, 주위에서 들은 야사를 기록하기도 했다.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서 매관매직은 크게 성행하였다고 한다. 주한 일본 외교관의 기록에 따르면 1866년(고종4)의 시세로 감사는 2만 냥에서 5만 냥, 부사는 2천 냥에서 5천 냥, 군수는 1~2천 냥에 거래 되었다. 


<매천야록>에는 수령을 비롯하여 감사, 유수, 병사, 수사 등에 이르기까지 외직은 모두 돈을 받고 팔았기에만 냥을 주고 벼슬을 제수 받기도 했다며 개탄하였다. 1863년 함경도 이원 땅에 사는 장세흡 이라는 사람은 3만 냥을 내고서야 겨우 수령 자리를 하나 보장 받을 수 있었다. 


 매관매직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기에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먼저 돈을 내더라도 나중에 더 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제수해 부임 한 달 만에 해임되는 진풍경도 있었다. 


관직을 구하는 자들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경우도 많았지만 거꾸로 관에서 먼저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양반가의 일기에는 참봉 벼슬을 제수하는 대가로 3만 냥을 요구 받았다는 내용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민간에서는 이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제수 받은 반갑지 않은 관직을 ‘벼락 감투’라 하였다. 갑자기 벼슬을 얻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번 관직에 임명되면 가산을 탕진하는 것이 마치 벼락을 맞은 것과 같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매천야록>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충청도 어느 고을에 강씨 성을 지닌 나이 든 과부가 있었는데, 집은 부유한 편이었지만 자식이 없어 ‘복구’라는 개를 기르며 살았다. 


그런데 원납전(경복궁 중건을 위해 징수한 돈)을 거둘 요량으로 마을을 뒤지던 관에서 마침 “복구야”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남자로 착각해 ‘강복구’라는 이름으로 감역 자리를 만들고 원납전을 요구하여 강씨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충청도에는 ‘구감역’(拘監役: 개에게 내린 감역 벼슬)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일화는 근거가 다소 빈약하지만 꾸며 낸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도대체 어떻게 개에게까지 관직을 제수하는 황당한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요직을 독차지한 세도가들은 ‘수령 천거법’ 같은 제도 장치를 통해 지방의 말단 수령 임명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벼슬 판매가 가능해지면서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고 그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일반 백성이었다. 돈을 바치고 관직을 얻은 수령이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 위해 각종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박탈되자, 유서를 쓰고 자결한다.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조선의 대표적 재야 인사로 성균관 생원을 지냈으나 과거장의 부패에 실망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전라도 구례에서 학문을 쌓으며 저술 활동을 하다가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조선의 주권이 박탈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나는 조정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며 유서를 쓰고 자결한다.


황현과 이 시대의 공직자들을 견주어 보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고 부적절하다. 하지만 공직자의 마음가짐은 예나 지금이 다를 수 없다. 윤리 의식은 물론이고 무거운 책임감과 의무가 지워짐을 알아야 한다. 


이번 총선 후보자들은 개인의 이해를 떠나 나라다운 나라를 위한, 국민들을 편안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봉사하겠다는 뜻으로 출마해야 한다. 요즘처럼 각종 붕당도 사건도 말도 많으면 공천 야사를 묶어 <공천야록>을 만들어야 할 듯싶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