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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wlee
경제 및 시사문예 종합지 <한인뉴스 부동산캐나다>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품격 있는 언론사로 발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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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1)-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
ywlee

 

 

 술과 친구는 오래 될수록 좋다는 말이 있듯, 친구는 역시 옛친구가 보고싶고 그립다.

 

 나에겐 인생에서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친구가 셋 있다. 그 중 한 명은 중학교 동창생. 시골 출신인 친구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어렵게 공부를 했다. 그런 환경 탓에 친구는 일찍 철이 들어 조숙했다. 그 또래의 언행이라곤 믿어지지 않을만큼 의젓하고 신중했다.

 

 친구는 자취(自炊)를 하며 힘들게 학교를 다녔지만 항상 의연하고 덩치도 커서 기율반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친구는 가정이 어려워 고교 진학도 포기한 채 주유소에 취직해 어린 동생들을 뒷바라지 해야 했다.

 

 그러다 친구는 공무원 시험을 통해 말단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예쁘고 착한 처녀와 결혼해 가정도 꾸렸다. 신혼집은 전형적인 단칸 셋방. 내가 어쩌다 신혼집에 들르면 아내는 온갖 반찬을 총동원해  주안상을 차려내곤 했다. 친구 부부가 나에게 쏟은 지극정성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친구에게 나는 우상 비슷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별것도 없는 나였는데 친구는 나만 만나면 너무도  좋아하며 속내를 터놓고 밤새 얘기를 했다. 어느 땐 내가 술에 취해 주책없이 신혼 단칸방에서 자고 온 적도 있다.       

 

 살림이 어렵긴 했지만 친구 부부는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친구가 언젠가 건강검진 때 위(胃)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친구는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와 시설이 뛰어나다는 S의료원에 입원했다. 검진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암 초기라 수술하면 별 문제 없을 것”이라 했고 우리는 그나마 안도했다.

 

 그런데 의사가 덧붙인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새로운 수술방법을 써보겠다”는 것이었다. 초기 암이라 어떤 방법을 써도 괜찮을 것 같으니 새 방법을 시도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곧 힘없는 서민을 대상으로 ‘실험수술’을 해보겠다는 예고였다.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 친구가 실험수술에 희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아들과 어린 딸, 30대의 꽃다운 아내를 두고 친구는 그렇게 갔다.

 

 친구가 떠난 후 나는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고 술에 취해 ‘친구여’를 부를 땐 예외없이 줄줄 흐르는 눈물 때문에 노래를 끝까지 부른 적이 없다.

 

0…나의 또하나 소중한 친구는 고교 때 단짝. 1학년 때 만난 우리는 친구보다 형제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피붙이처럼 지냈다. 학생회장을 맡는 등 리더십이 뛰어난 친구는 같은 성(姓)에 이름까지 비슷해 우리를 친형제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고교 3년 동안 함께 붙어 다니는 우리를 보고 급우들은 “너희들 연애하냐”고 놀리기도 했다. 나는 친구에게 원죄의식 같은 것을 갖고 있다. 대입준비를 하던 그는 내가 뚱딴지 같이 사관학교를 간다고 하니 자기도 진로를 바꿔 나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나란히 육사에 입학했다.

 

 하지만 천성이 유약한 나는 사관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1년 만에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내가 육사를 나오면서 마음에 걸린게 바로 친구였다. 나 때문에 진로까지 바꿨는데 내가 유혹(?)해 놓고선 뛰쳐나와 버리니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그후 나는 대학에 입학했고 정국이 혼미하던 당시 나는 허구한날 데모만 하느라 한동안 친구를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고교동창으로부터 이상한 연락이 왔다. “C가 아무래도 일을 저지를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대학근처 주점에선 친구가 육사 제복이 아닌 개구리복(예비군복)을 걸친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를 보고 하는 말이 “나도 따라 나왔지”였다. 나는 할말을 잃은 채 멍하니 서있었다. 친구는 누가 봐도 장군감이었으며 나는 그가 장차 별을 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리 되고 말았다.

 

 그 후 친구는 대학에 편입해 졸업한 후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회사에서는 그의 인물을 알아보고 중책을 맡겼으며 그는 누구보다 빨리 중역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를 본 것은 어느 보신탕집에서였다.

 

 내가 이민을 간다니 친구는 “너는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구나”하며 “캐나다에 가면 이런 것 먹기 어려울테니 많이 먹어둬”하면서 고기와 술잔을 연거푸 권했다. 헤어질 때 기차역에서 손을 흔들며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0…이민 와서 사느라 한동안 소식도 못 전했으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친구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아 회사의 최고위직까지 오르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내가 9년 만에 한국에 나갈  기회가 있었고 그때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실직상태였던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 얼굴만 만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당당하던 풍채는 어디 가고 수염이 꺼칠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이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친구의 그런 모습에 내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그 후 친구는 서울 어디에서 부동산중개인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 보면 멀어진다던가. 지금은 친구와 거의 연락도 끊긴 상태다.  

 

0…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는 것은 감상(感傷)이요, 떠오르는 것은 추억이다. 낙엽 지는 쓸쓸한 가을날, 서늘한 달빛 아래 마음 터놓고 술 한잔 기울일 친구가 있다면 참 좋겠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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