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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극장(劇場) (2부)-희년(禧年)의 축제(祝祭) (오십년만의 음악회)
yoobyungyong

 


 
 꿈결과도 같았던 나흘간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간 친구와는 계속 메일 또는 메신저를 통한 소통을 이어가며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부여된 삶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극적인 옛 친구와의 재회를 계기로, 또 하나의 드라마틱한 놀라운 만남이 연출 되었으니 그것은 그 시절 중2학년 음악을 담당하신 N 선생님과의 만남이라 하겠다. 


병용은 N 선생님과의 특별한 인연을 아직껏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생애 동안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아리고, 한편 슬프기도 한 숨은 비화가 병용의 인생 Black box 에 선명하게 흔적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하는 중학시절의 N 선생님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으로 교직에 부임하신 분으로 느껴졌으며, 그 시절 시골에서는 전혀 접할 수 없었던 첨단 New fashion 의 차림으로 혜성처럼 나타나신 분으로 각인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때까지 큰~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한 병용에게는 가히 충격적이고 파격적이라 할만한, 강렬하고도 대범한 이미지로 비추어진 그런 분이셨다.


그때 병용은 교내 음악경연(노래) 대회에, 친구들의 추천이 있었는지 아니면 예심을 통한 결정이었는지 확실하진 않으나, 반 대표로 뽑혀 선생님 앞에서 그분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연습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래실력은 불문하고 병용의 태도 즉 노래하는 자세가 앞을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천장만을 올려다 보는 것이, 선생님께는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아니하였다.


몇 번의 주의에도 끝내 자세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선생님께서는 그를 탈락으로 밀어 내시고 말았었다. 그때의 아픈 기억이 육십여 년 세월을 살아온 그의 가슴 한가운데, 아직도 가끔씩 애잔함과 쓸쓸함으로 다가와, 병용은 스스로 자신에게 연민을 보내곤 하였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병용은 혼자 부를 땐 스스로 자신의 노래 솜씨를 훌라시도 도밍고, 테너 박인수, 혹은 가수 윤형주와 같은 대열에 올려놓기도 하는 優 아닌 愚를 가끔은 저지르기도 하는 者이다. (사실 그때는 도밍고, 박인수, 윤형주와 같은 분들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며, 좀 과장된 표현법이 구사되었음)


한데 그의 약점이라면, 많은 사람들 앞에만 서면, 너무 긴장되는 탓인지 그만 꽁꽁 얼어붙어 평소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죽을 쑤어버리는 고질병이 도지는 것이었다. (나이가 든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그 나쁜 버릇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아 그 점이 늘 아쉽고 힘들기도 하였다. 더욱이 어릴 땐 더더욱 숫기가 없었고, 대담스런 기질이 못 되었으니. 그런 悲運의 추억 속, 그때 그 선생님을 반세기가 넘어선 지금 다시 뵐 수 있다니, 이것은 마치 悲戀의 연인이 통한의 눈물 속에 헤어졌다 수십 년 지나 뜻밖의 재회를 갖는 것처럼 온 세상을 다 얻은 기쁨과 감격, 뜨거운 감동의 해후를 나누는 듯 그런 감회와 느낌으로 병용의 가슴을 서서히 달구고 있었다. 


병용은 선생님과 수개월 동안 메신저를 통한 만남과 소통을 나누며, 상당히 친근한 관계로 발전 하였고, 비록 연배의 차이는 있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정서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선생님이 보내주신 가곡 CD에 수록된 그분의 노래가, 병용의 취향과 음악성에 차츰차츰 가깝게 다가왔으며, 나중엔 아침 저녁 출퇴근시 줄곧 선생님의 노래를 고정시킨 채 감상을 하며 즐기기에 이르렀다. 


병용은 본래 여성 성악가의 곡보다는 남성의 곡을 더 좋아하였는데, 그 오래된 음악적 취향이 선생님의 곡을 애청하는 사이 맥없이 허물어지고야 말았다.


그런 어느 날 병용은 갑자기 고국 방문을 준비하게 되었다. 약 두주간 일정으로 집안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지체 없이 바로 돌아와야 하는 바쁜 스케줄을 짜고, 출국하기 전 고국의 몇몇 친지들께 소식을 전하며 선생님께도 알려 드렸다. 


 며칠이 지난, 시월 하순경 서울에 당도하여 우선 중요한 용무를 처리하며, 틈틈이 지인들을 만나고 선생님께도 전화를 드렸더니 무척 반가워 하시며, 다음날 역삼동 00 요리점에서 00시에 만날 것을 제안하셨다.


지난 유월 캐나다로 병용을 찾아왔던 친구와도 함께하기로 약속을 하시며, 그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계시는 듯, 미세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다음날 친구와 먼저 만나, 그의 차를 타고 약속 장소에 가니 선생님께서 미리 기다리고 계셨다. 거의 53년만의 만남이니, 그런 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 까까머리 13세 소년이 육십 중반이 다 되었고, 이십 초반 묘령의 선생님이 칠십 중반이 다 되어 만나게 된 그런 운명적인 사건을, 반세기 세월의 두꺼운 벽을 뚫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사십오만 여의 시간을 관통하였다고 할까나.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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